<최진석의 장자철학> 10-3 덕의 파괴자 '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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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장자철학> 10-3 덕의 파괴자 '향원'

notsun 2020. 2. 3. 21:02

향원이란?

 

한계에 대면하는 능력이 준비되지 않고,

한계를 대면할 때 직접 자신의 송곳으로 쓸 정도의 함량이 준비되지 않으면서

 

일정한 범위의 깨달음과 지식으로 신성을 듣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을

논어에서는 향원이라고 한다.

 

글자대로 해석해 보면 '동네 원님'이라는 뜻이다.

 

일정한 범위(동네)안에서 공통 의식과 공통 경험을 기반으로

신념과 이념을 가지고 거기서(동네)만 존경과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향원은 덕의 파괴자'

 

공자는 향원을 '덕지적야' "덕의 파괴자다"라고 했다.

 

그럼 향원이 왜 덕의 파괴자일까?

향원 중 큰 향원을 하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얼마나 추한지를 모르는 상태의 하백을 향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향원들은 덕을 파괴한다.

 

향원은 함량을 파괴하는 것이다.

너를 너이게 하는 그 근본적인 힘(동력)찾지 못하게 한다.

 

향원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 자기는 하백 이상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백이 향원이 스스로 존경을 받는 것에 만족하고 좋아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을 더 한계를 돌파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붙잡아 두는 꼴이된다.

 

동네에는 동네 향원이 있고,

자기 안에는 자기 안의 향원도 있을 수 있다.

 

이 향원은 함량이 작은 사람...

범위가 좁아 깊이가 얇아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에서 인정을 받는 곳은

그 동네와 그 사람은 자기 한계를 볼수가 없고

한계를 볼 수 업서는 한 그 이상을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없다.

 

덕의 힘은 지금 있는 나를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힘

질문하는 힘, 욕망 의지 베짱, 그릇.... 이것이 덕에 가까운 것이다.

 

향원들이 사는 동네에서 향원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한계를 넘어서는 덕을 발휘하기 어렵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과학이다.'

 

보통 한계 중에서 인간의 의식과 삶을 규제하는 강력한 진리와 선의 옷을 입은 한계들...

대표가 정치적 신념과 윤리적 신념 도덕적 신념  가장 강력한 것이다.

 

신념을 자세히 들어야 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에 관련된 지식을 계속해서 섭취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더 강화만 될 뿐이다.

 

사람을 키우는 것 중에 더 잘 키우게 하는 것은 '과학'이다.


 

장자는 어떻게 해서 이런 정치적. 윤리. 도덕 견해에서 이런 통찰을 갖게 되었는가?

 

장자는 가치보다는 사실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치에서 벗어나 사실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그 때 내면의 능동적 동력이 덕이다.

 

벗어난 자아를 무아라고 한다.

무아=진아, 참된 나

우리가 무심, 무아 모두 윤리, 도덕, 정치적 관념으로 부터 이탈한 상태다.

 

참된 나를 들어내는 좋은 방법은

주관적 태도 줄이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식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발전 단계에서 시급한 것은

철학이나 인문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을 보는 것이다.

 

최신 과학적 경향에 대해 인식이 없는 철학적 주장들 중 많은 부분이 헛소리 가능성 크다.

 

과학을 읽지 않으면 자기 안에 있는 주관적 신념이 더욱 강화된다.

이 세계에 사실적 진실과 친해져야 한다.

 

그래서 시중에 '열두발자국, 떨림과 울림' 같은 좋은 책은

과학적 인식에서 도달한 성숙된 철학적 관점이어서 더 대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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