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장자철학> 9-7강 돈과 자본, 부자와 자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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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장자철학> 9-7강 돈과 자본, 부자와 자본가

notsun 2020. 1. 5. 20:01

 

 

 

 

시민, 민주주의의 등장

 

진취적으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근대성을 비판한다.

물론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포스트 모던, 퓨처로 나아간다.

 

하지만 근대라는 것은 잘못된 사회가 아니라

중세에서 진화된 매우 발전된 형태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인간 진화에 있어서 매우 고급스러운 형태이며,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왕정을 끝내고 이룩한 삶의 한 형식이다.

 

왕정이란 왕이 재화의 분배권과 소유권과 다 가지고 있었던 시대인데

산업 혁명 이후 사회 계급 구조가 달라지게 된다.

 

왕이 재화를 분배하던 상징적 공간 '광장'이었다.

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역할이 축소되면서

광장이 자기 물건을 파는 공간(시장)으로 변형된다.

 

거래를 하는 시장안에서 활동하던 사람을 시민(시장 사람)이라고 한다.

 

왕정시대에는 사적 소유가 안되었지만,

왕권이 약화되자, 사적 소유가 중요한 권리로 바뀜

 

사적소유권을 가진 사람을 시민

시민이 주도권을 가진 정치형태. 즉 민주주의가 발생(왕정과 대비) 한 것이다.

 

 

출처: pixabay.com

 


역사적 책임성

 

왕정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왕이 제대로 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시민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정치구조도 역시 우리가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역사적 책임성이 왕에서 시민으로 바뀐 것.

역사적 책임성이 없는 시민은 대통령을 왕으로 안다.

 

재화 분배권이 왕에서 개인에게로 넘어왔으면

생산된 재화를 가지고 개인이 왕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바뀔 때 핵심은 자유도 권리도 아닌 역사적 책임성이다.

역사적 책임을 왕이 가지면 왕정, 시민이 가지면 민주주의인 것이다.

 

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은 역사적 책임성이다.

자유가 먼저냐 권리가 먼저냐?는 다 할 말 없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이다.

 

그 책임성이 발휘되는 시민의 태도는 무엇인가?

'내가 이 사회와 국가의 책임자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출처: pixabay.com

 


 

 

부자와 자본가

 

개인이 가진 재화가 역사적 책임성을 가지면 '자본'이라고 한다.

역사적 책임성이 없는 자본을 ''이라고 한다.

 

역사적 책임성이 없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하고

역사적 책임성이 있는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자본가라 한다.

 

원래적 의미에서 본다면 자본가와 자본의 성숙이 시민의 성숙을 가져오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온다.  그러면 그 나라는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다.

 

'부국강병'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지 않는 한 다 헛소리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부와 강함이 없으면 국가 자체가 아니다.

 

왜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가?

왕정보다 민주주의가 부강한 나라가 되는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출처: pixabay.com

 


지적 반성

 

습관적으로 자본의 노예라든지, 인문학의 적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정도로 살아서는 안된다.

 

자본주의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역사를 진행해 오면서 이룬 매우 수준 높은 형태이다.

 

그것이 진리라는 소리는 아니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의'라는 말에 갇히게 되면, 그 근본적인 책임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믿음의 싸움으로 바뀌게 된다.

 

민주시민이다.  책임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와 사회를 내가 책임진다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자각이 있는 사람은 소량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자본가다.

 

우리가 개념을 사용할 때 지적 반성이 없이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지적 반성력이 매우 떨어진다.

 

지적 반성력이 떨어지면 감각과 본능에 가깝게 된다.

반성 없이 정치적 구호를 쓰는 사람은 절대 지적이지 않다. 감각과 본능대로 산다.

 

인간을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까지는 지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믿음의 대상으로 놓고 지적 반성을 멈추고 정치적 선언으로 사용하면

감각과 본능을 드러내는 인간으로 바뀐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아주 철저한 반성이 지적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우언편'에서 왜 이야기를 하는가?  습관적으로 정해진 말에서 왜 벗어나는가?

 

지적 반성이 없이 정치적 신념에만 갇혀서 적과 아군으로만 분할되어서 사는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우원편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https://youtu.be/E7Q2sdNO-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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