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장자철학> 9-5강 책 속에 길이 없다. 9-6강 정해진 말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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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장자철학> 9-5강 책 속에 길이 없다. 9-6강 정해진 말의 노예

notsun 2019. 12. 29. 17:33

"책 속에 길이 없다."

 

출처: pixabay.com

독서를 하는 것은 보통 책 속에 길이 있다.라고 한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책 속에는 책 쓴 사람의 길만 있다.

 

자기 길은 자기에게만 있다.

 

책을 읽은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책의 쓴 사람의 길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 길을 찾는데 자극을 받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은 책을 책 쓴 사람의 추종의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길을 찾기위해 책을 읽을 수 있다.

 

책 쓴 사람의 길을 쫓기 위한 것은 '찌꺼기'만 자기에게 남는 것이고,

 

책 쓴 사람의 길을 보면서 내 길을 찾는 것은

책이 찌꺼기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수가 될 수 있다.


" 정해진 말의 노예 "

 

우리나라의 똑똑한 젊은이와 이야기해 보면

전부 '전쟁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 젊은이와 이야기하는데

'전쟁은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전쟁은 주도권을 잡기위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전쟁이 터질지 안 터질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전쟁이 문명에 끼친 영향이 무엇입니까?

이걸 묻고 토론한다.


전쟁은 국가단위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쟁하는 집단이다.

국가는 폭력 집단 단위이다.

조폭과 같다.

 

국가는 폭력집단이고 폭력 관리집단이다.

국가를 폭력을 전부 걷워드린다. 

모두 관리하고 결정한다.

 

대내적으로 경찰, 대외적으로 군대를 사용한다.

 

헌법에 대통령이 군통수권자로 되어있다.

대외적으로 폭력을 관리해야 한다.

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

 

국가 레벨에서 반응해야할 것은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피할 수 없다면 피하지 않겠다."

국가가 취해야 할 모범답안이다.

 

출처: pixabay.com

그냥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더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폭력)을 관리하는 하는 집단에 속하고 있다.

단지 윤리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 본질을 더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 우리는 세계를 도덕적, 윤리적으로 판단한다."

 

이즘, 주의  등 정해진 말에 갇히면 ,

인간은 좁아지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감각적으로 빠진다.

 

이 세계를 도덕적, 윤리적으로 판단한다.

좋냐?, 나쁘냐로 따진다.

 

출처: pixabay.com

그것이 세계 속에서 가지고 있는 진실을 보지 않는다.

윤리 도덕에 쉽게 빠진다.

 

 

 

우리 머릿 속의 평화...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가? 머릿속의 평화라는 단어를 집행하는가?

 

민주주의라는 삶의 형태를 추구하는가? 머릿속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집행하려 하는가?

 

자기가 정한 용법 대로만 말을 사용하면

세계의 진실과 접촉할 수 없다.

 

이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출처: pixabay.com


"내 삶은 없다"

 

뉴튼에 대해 공부한다.

만유인력과 중력에 대해서만 공부하는 한

자기가 정해놓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집행한는데 별반 차이가 없다.

 

뉴튼이 생산해 낸 만유인력과 중력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만유인력과 중력을 생산해 낼 때 내면에 가지고 있었던

활동성, 지적인 을 배워야 한다.

 

출처: pixabay.com

뉴튼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왜 그대로 있는가?

 

만유인력이 생산될 때 뉴튼이 사용했던 궁금증을 배우지 못하거나 따라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만유인력이나 중력과 같은 이론을 만들 수 없다.

 

이는 내 방식대로 세상을 살 수 없다.

남들이 정해놓은 민주주의, 자본주의에서 살지

내 삶은 없다.

 

내것이 없이 정해진 것을 집행하면서 산다면

다른 것은 모두 적이 된다.

 

세계의 진실에 접촉해야

삶의 효율성과 공동체의 효율성이 증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정해진 말에 노예가 될것이냐?

아니면 정해진 말을 밟고 서서 내 말을 할 것 이냐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내용으로 써진 것이 '추수'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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