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장자철학>15-3강 왜 질문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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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장자철학>15-3강 왜 질문이 없는가?

notsun 2020. 8. 14. 21:21

선자선지 불선자역선지 득선야

善者善之 不善者亦善之 得善也

 

" 선한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면

네 덕이 선해진다."

 

 

이 문제가 정치적 문제를 만나면 곤란해진다.

 

정치적인 신념을 갖게되면 지적이지 않게 된다.

지적활동의 핵심인 '반성력'이 뚝 떨어니다.

 

자기와 반대되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쁜사람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 안 보인다.

 

 

이와 유사한 것이 종교적 신념이다.

 

고급스런 모임에서는 정치와 종교이야기는

꺼내는 것은 금기이다.

 

정치와 종교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자기가 숨는다'는 것이다.

 

 

 

자기 대신 '신념'을 내세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자기를 보여주지 않고

대신 자기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정치적인 지도가 불선자일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선과 불선을 당신은 판단할 수 있는가?

 

'덕'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적 신념'이다.

 

덕이 활동하는 공간을 확실히 줄여버린다.

 

불선자인 정치인을 대하는 나의 덕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바로 극단적 대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단순한 선택 속에 빠졌던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 사태를 덕의 활동성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견고한 '신념'으로 때하기 때문에

양자 택일 속에 빠져 버린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덕'이

작동한다는 말은

아주 얄팍한 이념 대립을 선택하지 않는다.

 

"책 한권 읽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덕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 자각, 각성, 지식의 생산 이런 것들은

모두 '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굳건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지식의 생산', '다음' 을 말할 수 없다.

 

협치는 덕이 준비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덕이 준비되지 않으면

나를 이탈해서 나를 바라 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탈해서 나를 바라보는 능력을

우리는 '반성'이라고 한다.

 

지식인이 부패하고 협치가 안되고

창의성이 발휘가 안되고 효율성은 떨어져도

자기가 한번 믿는 정책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것은

덕이 훈련되지 않고 없기 때문이다.

 

 

 

덕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네가 어떻게 살 것이냐?

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의 토대이다.

 

왜 노벨상이 안 나오는가?

"결국 덕의 문제다"

왜 질문이 없는가로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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