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장자철학> 8-3강 시인의 위대함과 피노키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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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장자철학> 8-3강 시인의 위대함과 피노키오 이야기

notsun 2019. 12. 7. 07:29

'논증. 논변'보다 더 센 것이 '이야기'다.

 

이야기는 개념들로만 치밀하게 짜인 것이다.

 

개념들로 구성된 것들로 주장하는 것을 '논증' 또는 '논변'이라고 한다.

 

인간이 사용하는 태도(도구) 인 논증. 논변과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더 세냐고 한다면

'이야기'가 더 세다.

 

"논증할 수 있는 인간보다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 더 세다."

 

논증은 이마에 '川' 새기고, 몸에 힘을 주며 오래 앉아 있으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지 못하다.

 

"8-1강 합의된 기준이 폭력을 만단다." 강의에서

장자는 일반 철학책과 다르게 우원(이야기)로 되어 있고,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강의를 하셨습니다.

왜 '이야기'가 중요한지 이제 말씀하십니다.


"시인은 개념을 지배한다."

 

시는 진실을 혹은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다.

시는 허위환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일반인은 개념을 사용하지만, 개념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용 중인 개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시인은 개념을 지배하고, 개념을 마음대로 다룬다.

시인은 써야할 개념을 쓰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것을 사용하고,

개념을 중첩시키고, 일반적 개념을 거꾸로 사용하고,

개념과 개념 사이의 거리를 늘려버리는

다양한 시도를 한다.

 

시인은 이런 시도를 통해 인간에게 '진실을 접촉하는 길'을 알려준다.

출처:pixabay.com


"가장 신에게 가까운 것은 '춤'이다."

 

'시'까지도 개념들이 들어가 있다.

 

개념들을 이리저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아예 없는, 개념이 태어나기 전,

그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시도)이

'음악'이다.

 

음악은 문자보다 소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리가 문자보다 신에게 더 가깝다.

 

이 소리를 벗어난 더 신에게 가까운 것은

'춤'이다.

 

따라서 인간의 높이는

논변. 논증 < 이야기 < 시 < 음악(소리) < 춤

으로 측정될 수 있다.

출처:pixabay.com


 

 

"시는 자기가 튀어나오고 토해지는 것"

 

소설가를 만나보면 자기 소설과 똑같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을 쓴 작가와 만나보면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기 시와 똑같을 가능성이 더 크다.

대부분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면 시와 같이 닮아있다.

 

소설은 쓰는 것이지만,

시는 진실된 자기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

시는 자가기 튀어나오고, 토해지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야기를 하는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개념을 이겨내기 위함이다.

이야기는 관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논변. 논증

개념을 이겨낼 것을 포기하고,

개념의 세계에 빠져서

개념들을 어떻게든 정해진 체계로

치밀하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개념은 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남겨두는 한 세계의 진실과 접촉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의 진실과 접촉하는 통로를 만들 수 없다.

그 통로에 가장 가까운 것이 '이야기'이고 ''인 것이다.

출처: pixabay.com


만약 '거짓말의 도덕적 함의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이 있다고 하자

거짓말을 어떻게 하면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다 나온 논문이다.

 

또는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명령'을 많이 한다.

 

이런 논문이나 명령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피노키오' 이야기를 읽으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출처:pixabay.com

 

 

https://youtu.be/cD17frvvs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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