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을까?
왜 시는 더 설득력이 있을까?
왜 음악... 춤은... 설득력이 있을까?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찰기시(근원을 살펴봄)"
장자 부인 장례식 이야기 장자의 부인이 죽었을 때 '혜시'가 조문을 갔다. 그런데 장자는 정작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혜시는 "눈물을 안 흘리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하며 물었다. 이에 장자는 " 왜 나라고 슬프지 않겠는가? 그런데 '찰기시'(근원을 살펴봄)해서 보니, 우리 부인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뿐이었네. 이 얼마나 축하할 일이 아닌가?" 했다는 이야기 |
보통 논증에 빠진 사람들은
장자의 부인이 죽었을 때 장자가
1) 우는 것이 진실이냐? 2) 노래를 부르는 것이 진실이냐?
하고 상대방을 사람으로 조차 보지 않을 만큼 죽어라 싸운다.
장자가 질그릇을 두드리면 노래 부르기 전까지는
보통 사람들은
1) 곡을 크게 하는 것이 진실이다. 2) 아니다. 슬픔을 억누르고 곡을 적게 하는 것이 진실이다.
라고 싸운다.
하지만, 정작 장자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른 근원은 '찰기시' 했기 때문이다. 그 근원. 근본을 본 것이다.
우리는 그 근원. 근본을 보지 않으려 하고
'기능적인 것'만 보려고 한다.
" 우리 가슴속에는 어떤 신념. 진리가 있는가? "
그 진리가 이야기의 날개를 달고 날지 않고,
개념에 갇혀서 '논증'에 빠진 태도를 갖는다면
이 역사가 새로워질 수 없다.
근원을 안 보면 '기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양이 안되고, 수양을 포기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기가 한 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완장'이라고 한다.
근본을 논변이 알려주기 쉬울까?
아니면 근본을 이야기가 더 알려주기 쉽겠는가?
바로 '이야기'가 그 근본을 알려주기 쉽다.
"논변은 치밀한 구조로만 구성되어 있다."
요즈음은 논쟁, 논증, 논변만 있지 '이야기'가 사라졌다.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자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논문과 이야기의 차이"
논문, 논증, 논변은 자기의 주장을 하는데 '구멍'이 있으면 안 된다.
매우 치밀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주장을 한다.
'치밀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견고히 한다는 것이고,
'주장'의 성격은 매우 배타적인 것이다.
논문은 배타적 속성이 있다.
그럼 이야기가 왜 더 논문보다 설득력이 있느냐는...
이야기는 구멍이 듬성듬성 나 있고, 논리가 없으며, 때로는 횡설수설하다.
가끔은 말이 안 되는 것도 많다.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에 상대방(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논문에는 읽거나 듣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이 없다.
논문 심사를 '디펜스'(방어)한다고 표현한다.
방어란 성벽을 튼튼히 쌓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화자와 청자가 만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감동(感動. 자기의 전 인격이 참여해 움직여지는 것)이 크다.
논문은 서로 치고받고 하지만,
피노키오 이야기는 함께 만나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감동을 교환할 수 있다.
논문은 속성이 방어하는 것이라 단절과 폭력성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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