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전쟁사_팍스로마나(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나?)

배움의 행복

세계사.전쟁사_팍스로마나(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나?)

notsun 2020. 5. 22. 09:14

카이사르 죽음 이후 권력을 위한

내전이 시작됩니다.

 

누가 카이사르의 뒤를 이을 것인가?

 

카이사르 장례식 이후 불거진

후계자 다툼

 

셰스피어의 소설과 다르게 브루투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브루투스의 연설에 술렁거린 로마시민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연설 한방에 뒤집어 집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유언장에 로마 시민에게 75드라크마 지급과

자신의 땅을 모두 기부한다는 말에 뒤집어 집니다.

 

이어서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라고 공개합니다.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18세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고

카이사르에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던 조카 손자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왜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았나?

 

한니발은 정치를 모르는 군인

카이사르는 군인과 정치인이었다면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는 말처럼

 

카이사르는 군인의 역량은 없으나 정치적 재능이

뛰어난 옥타비아누스를 다음 시대에 필요한

리더 상으로 꿰뚤어 봤던 것입니다.

 

다만 군사적 재능이 없어

아그리파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여주어

부족한 군사적 재능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4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그리파

 

당시 젊고 유능한 인물로 카이사르에

발탁되어 옥타비아누스를 보좌한 인물입니다.

 

브루투스

카이사르 애인의 아들로 카이사르에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암살의 의도는 황제정으로 가려는 카이사르를

없애고 공화정을 지키려했던 것입니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충실한 오른팔이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성장 단계로

정치와 군대의 분리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비록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탁월한 지도자 였습니다.

 

 

 

 

후계자 옥타비아누스 지명에 따른 파장은?

 

제일 혼란스러워한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따르던

군단으로 이 유언을 따를것인가 고민했지만

 

결국 군단이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면서

안토니우스도 인정을 하고 동맹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레피두스를 끌어들여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이두정치(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가

시작됩니다.

 

 

반면 카이사르의 암살자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격으로 도망치듯 떠난 후

암살 공모자 카시우스와 함깨 그리스에서 군사를 모집합니다.

 

그리고 근거지 주둔 군대 중심으로  

서방군단과 동방군단의 내전으로 치닫습니다.

 

서방군단 vs 동방군단

 

삼두정치파는

22개 군단, 보병 약 10만명, 기병 약 1만 3천기

 

암살파.공화파는

19개 군단, 보병 약 7만명, 기병 약 2만기로

 

카이사르 암살 후 첫번째 로마내전

1> 필리피 전투로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 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한

필리피에서 두 세력이 맞붙습니다.

 

 

로마의 군사도로 '에그나티아' 가도의 요충지이기도 한

필리피는  

 

도로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언덕,

주변의 숲과 늪지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 공화파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화파의 전략은 보급에 유리하니 장기전으로 가면 우세

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공화파(암살파) 지휘관은

학자인 브루투스와 군인인 카시우스였고

 

삼두정치파 역시

정치가 옥타비아누스와 군인 안토니우스로

대결구도도 비슷했습니다.

 

 

또한 양쪽 모두 로마군단이기 때문에 전투방식.전술도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인의 가장 큰 특징인 '표준화'로

막상막하의 전력이었습니다.

 

1~2차 필리피 전투는

초반 암살파는 옥타비아누스 군대를 급습해 승기를 잡았지만

해전에서 암살파가 승리해

결과적으로 삼두정치파 2개 군단이 격파됩니다.

 

필리피 전투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

 

역사의 미스테리인데

개연성이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공화파 브루투스가 승승장구하던 상황에서

메마른 대지와 전쟁터의 자욱한 먼지로

브루투스의 승전을 몰랐던 카시우스는

패배했다고 오판하고 자결하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말렸고 다시 승전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승리 소식에도 카시우스는 끝내 자결을 합니다.

 

카시우스의 자살로 자신감을 상실한 공화파 군대는

2차 필리피 전투에서 삼두정치파에게 완패합니다.

 

이렇게 반대파가 해결되고 결국

두 인물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구도가 됩니다.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로마 분할 정치가 시작되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 이집트, 그리스 등

속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군단과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로

이집트까지 장악해

안토니우스 세력권에 옥타비아누스가 포위한

 꼴이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 권력보다 사랑?

 

정치 내조에 능했던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뒤에서 정치 간섭을 하게 되고

 

카이사르를 따라 이집트에 갔다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된 계기로 사랑에 빠지고

본처 풀비아가 알게되고 살해 위협까지 느낍니다.

 

풀비아는 이런 상황을 못 참고 안토니우스의

동생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풀비아는 유배 중 사망합니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가 정략결혼으로 혼인동맹을

제안하고 자기 동생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를

결혼시킵니다.

 

결국 혼인 동맹으로 결혼은 하지만 안토니우스 마음은

클레오파트라에게 가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편지를 받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사랑과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이집트로 향합니다.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는 기다리지 말라는 편지를

옥타비아에게 보내고 혼인 동맹이 파탄이 납니다.

 

본래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클로오파트라와의 정식 결혼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게 되고

"이집트 왕이 되어 이집트 중심의 제국을

만들려 한다."라는 악소문까지 번집니다.

 

또한 아르메이아 왕국 평정으로 개선식을 하는데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함으로써

더욱 로마인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여기에 안토니우스의 편이었던 갈리아 군단의 총사령관의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치를 무시하고 총사령관을

자신의 사람을 앉힙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 파르티아 원정 실패로 군사력 약화

- 사라진 갈리아군단의 지지

- 잃어버린 로마의 민심

으로 삼중고에 시달리고 전쟁을 결심합니다.

 

 

 

 

악티움 해전

 

로마 내전 최후의 결전

안토니우스 vs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해군

5단, 8단, 10단의 대형 군선을 포함해

전함이 약 230척, 보병 약 2만명, 궁수 약 2천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현 군선의 단점은

속도의 탄력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소형 군선에 비해 방향 전환이 어렵습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 해군 지휘관인 아그리파는

대형 노선 대신 가볍고 경쾌한 기동성 있는

소형 군선 '리부르나' 투입합니다.

 

 

또한 안토니오 해군은 훈련도가 낮은 이집트해군이 주축

이었으며, 정원보다 미달된 함대 병력이었습니다.

 

아그리파 해군은 훈련도가 높고 정원을 채운

완전편제 함대였습니다.

 

여기에 안토니우스의 전략적 실수가

'노꾼'의 임금 등 대함대 운용의 재정 부담과

대규모 식량 조달 문제를 모두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해군에 맡겨버립니다.

 

그리스 북서부 안부라키아 만에 위치한 악티움의 지형을

활용하여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 해군의 좌우

보급로부터 차단합니다.

 

 

이렇다 보니 해군력의 1/3이 참전하지 못하게 되고

여기에 아그리파의 전략인

빠른 '리부르나'로 대형 군선의 노와 방향타를 파괴합니다.

 

또한 공성무기 발리스타로 불화살을 발사해 교란시킵니다.

 

 

악티움 해전에도 미스터리가 있는데

좁은 만에서 서로 대치하던 중 식량 문제로

결국 안토니우스 배가 넓은 바다로 나오지만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간격을 두고 계속 대해로 유도합니다.

 

 

대해로 나오다보니 바람 방향 등으로 함대들의 간격이

벌어지고 여기서 이집트 함대가 중간으로 돌진하여

양방향 공격이 가능한 시점에 그냥 이집트로

도망쳐 버립니다.

 

그 광경을 보고 소형 군선으로 갈아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서 도망칩니다.

 

여기에 배신감을 느낀 안토니우스 부하들

 

모든 신말을 잃은 안토니우스는 심한 우울증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자결합니다.

 

카이사르가 왜 자기가 아닌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했는지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반성이 필요했었습니다.

 

이로써 내전의 승리자는 카이사르가 지명한

옥타비아누스가 됩니다.

 

인물탐구 '옥타비아누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존귀한 자' 라는 뜻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길한 기운을

의미하며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친 칭호입니다.

 

실제로는 황제였지만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강력한 정치적 리더를 필요로 하는 여론을 간파하고

일반 포로는 살려주지만 주동자는 가차없이 사형시킵니다.

 

내전이 끝나고 연설에서도

"내전이 끝났습니다. 이제 로마 공화정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군사력을 모두 쥐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함부로 할 수 없고 또한 카이사르 암살로 황제라는 칭호

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황제 아닌 황제 같은 거부감 없는 칭호

"아우구스투스"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분리되어 있던 군사와 행정의

최고통치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프린캡스'(1등 시민)라는 칭호도 스스로 만듭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이 월급 주고 훈련시키던 사병을

로마 44개 군단 국가의 군대(상비군)으로 개혁합니다.

 

세금으로 군인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부자에게 상속세를 걷어 군인 월급으로

군 전역시 특별보너스와 토지를 지급합니다.

 

빈민계층에 대한 무상곡물 제공 역시

국가의 역할로 바꾸었습니다.

 

결국 부자들에게 걷은 돈으로 국가가 신망을

얻는 시스템으로 개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로원, 민회 등 공화정 체제는 유지하고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업적은?

 

그도 역시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처럼

영토를 넓히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로마 영토로 편입시키고

소아시아까지 진출하고 로마에게는 미지의 땅인

게르마니아 진출에 나섭니다.

 

 

 

로마 군단의 무기는?

 

대대적인 영토 확장에 나선 로마군단의 무기

 

공성무기는

발리스타와 캐터펄트가 기본입니다

 

발리스타

더 발전해 목재 대신 금속 프레임으로 변경하고

강한 밧줄 스프링 사용으로 사정거리를 증가시켰습니다.

다만 기동성이 떨어져 야전보다는

공성전 위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캐터펄트

백인대에 1기씩 배치해 사용했으며

청동 스프링으로 개량해 약 90kg의 돌을

400m 밖까지 날려 공격했습니다.

 

 

망고넬(트레뷰셋)

캐터펄트를 대형화한 투석기

약 50~140kg 바위를 200~500m까지 날릴 수 있었으며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투석기로 적의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리에스(숯양)

양머리 모양의 금속 추 또는 금속 덮개를 씌운 추를

흔들어 성벽과 성문을 부수는 파성추

 

 

헬레폴리스

그리스식 공성탑을 사용했으며

높이 30m 이상의 거대한 공성탑이 등장했고

파성추, 투석 병기는 물론 적의 성에 침투하는

가교까지 탑재했습니다.

 

 

방여용 무기

 

로마의 번영기에는 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용 무기가

발달하였으며 대표적 방어용 무기 3종이 있습니다.

 

세르부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막기 위해 뾰족한

나무 꼬챙이를 성벽에 설치해 적의 침입을 막는 것입니다.

 

스티머러스

성벽 앞 대지에 박은 나무꼬챙이로

긴 것과 짧은 것을 섞어 설치했습니다.

 

 

리리움

성벽에 근접하는 적을 빠뜨리는 함정

 

 

게르마니아

 

게르마니아는 당시 미개한 부족으로 통했으며

라인강-다뉴브강과 경계로 로마제국과 대치했었습니다.

 

 

그럼 왜 로마가 게르마니아로 가야 했을까요?

 

로마에게는 지속적인 영토 확장이 선순환

되어야 제국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내전만 치러왔기 때문에

외부의 적과 싸운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로마는 게르마이아를 평정하기 위해 행전관을

파견한느데 그의 이름이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 였습니다.

 

 

현지 총독으로 파견된 바루스의 폭정으로

게르마니아의 복수. 증오심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이 때 게르만 족에 영웅이 탄생하는데

그의 이름이 '아르미니우스'였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20살에 로마군의 용병으로

활약해 로마군 장교로 성장하며 각종 전투에서

공을 세워 로마시민권까지 얻었습니다.

 

당시 로마군은 본군과 보조병 부대로 나뉘며

보조병 기병대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마군단 보조병 부대 구성을 보면

기병, 궁병, 투석병으로 특화된 구성되어

활약이 컸을 것입니다.

 

또한 행정관료 출신의 총독 바루스가

아르미니우스에게 군사적 의지도 많이 합니다.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군대를

배우려고 했던 아르미니우스였지만

바루스의 폭정에 민족적 분노가 고취된 것입니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로마군단 vs 게르만 족 연합군

 

반란을 준비한 아르미니우스는 철저하게 계획하는데

바루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토이토부르크' 숲으로 로마군을 유인합니다.

 

토이토부르크 숲으로 진입한 로마 3개 군단은

좁은 숲을 통과하다보니

대열의 길이만 약 20km가 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로마군 특유의 조직적 전투가

불가능했고,  원래 로마군 이동시 전후좌후

정찰병이 붙게 되는데 이 정찰병 역할을

보조군인 아르미니우스의 부하들이 담당했습니다.

 

또한 바루스는 이쪽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길

안내까지 아르미니우스에게 길을 맡깁니다.

 

이렇게 되니 아르미니우스는 쉽게 함정으로

유인할 수 있었고 게르만족 연합군은 이미

언덕 비탈처럼 참호 장벽을 만들고 매복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발군된 참호의 길이만 1.5km에 달했다고 합니다.

 

때가 되자 아르미니우스는 공격 명령을 내리고

게르만족은 로마군의 투창 필룸으로 로마군을

일제히 공격합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는 중간중간 허리가 끊긴

로마군을 기병으로 유린합니다.

 

로마군의 장점이 밀집대형인데 이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4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 3개군단

2만명이 전멸하게 되고

 

바루스는 전투 첫날 충격으로 자결을 하게 됩니다.

 

이 패배는 아우구스투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설욕전을 맡은 로마 사령관 게르마니쿠스

(폭군 칼리큘라 황제의 아버지)가 투입됩니다.

 

 

원래 숲에서 싸우는 전투는 1개 군단이 먼저 진입하고

나머지 군단이 배후에서 진영르 갖추고 엄호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는데

게르마니쿠스는 이런 전투의 기본을 잘 지켜 겨우

복수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아우구투스는 라인강과 다뉴브 강을 넘지 마라

라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 결단의 이유는

첫째 게르만족 공격은 지형상 공격이 어렵다는 것

둘째 들어가도 땅이 척박해서 돈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토가 넓어지면 유지비용이 들어가는 등의 이유로

로마제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가 나온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뜻으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시작된

로마제국의 번영기 이후 약 200년간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주국방의 의미는 아니고

돈으로 사는 평화는 결국 적에게 먹히고

힘에 의한 평화는 힘 조절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의 국경에서는 반란을 막고

미리 견제하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힘의 남용으로 분도에 치달은 게르만족에 의해

서로마가 수백년 후에 멸망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상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youtu.be/y3Dtwhe5c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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