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전쟁사_ 몽골전쟁사 1(칭기즈칸의 정복전쟁)

배움의 행복

세계사.전쟁사_ 몽골전쟁사 1(칭기즈칸의 정복전쟁)

notsun 2020. 6. 5. 00:07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한 국가 몽골

 

“바람처럼 초원을 떠도는 유목민족

모래알처럼 뭉치지 않는다.”

 

칭기즈칸 등장 이전 몽골족의 상황은?

 

8세기경 유럽에서는 바이킹이 등장하고

아시아에서 몽골족이 등장합니다.

 

몽골족의 뿌리는

헤이룽 강(아무르 강)중.상류 유역에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부족으로

11~12세개 전후 몽골고원에 진입합니다.

 

 

몽골의 어원은 ‘영원한 불’을 뜻하며

이름이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이라는 부부가

낳은 아들이 몽골족의 시조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12세기 여진족 금나라 성장으로

양쯔강 이남으로 밀려난 남송

 

여진족 금은 원래 거란족 요나라에 핍박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 핍박을 몽골족에게 그대로 가합니다.

 

 

“몽골의 남자들은 모두 죽여라” 등

금나라는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2세기 몽골 내부 상황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는 척박한 유목생활로

바이킹처럼 겨울에는 식량이 모자라서

부족 간의 약탈이 잦았습니다.

 

얽히고 설키 원한 관계 속에 보호를 받기 위해

강한 리더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안다’ 형과 아우의 서열 없이 동등한

의형제, 평생의 친구를 뜻하지만

그 정도 의리를 찾는 다는 것은

그 만큼 배신이 판을 쳤던 유목생활이었습니다.

 

더 강한 자를 따르는 유목 민족의 숙명이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말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리더의 조건이 복수였기 때문에 끊임없는

복수혈전이 생긴 것입니다.

 

12세기 몽골고원에는 몽골족 뿐만 아니라

타타르,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부족이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복수혈전으로 부족간의 대립이 일어났고

금나라는 이를 잘 이용해 몽골의 내부 분열을

부추겼습니다.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

 

 

 

파괴자, 신의 재앙 왕중의 왕, 대전사 등

수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시절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친

‘테무친’은 강철, 좋은 쇠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몽골 보르지긴 씨족 부족장

'예수게이'였습니다.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과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족장의 이름을 타서 테무친이라고 지어줬습니다.

 

9살 혹은 13살 무렵 테무친과 옹기라트 부족의

보르테와 약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인에게

아버지 예수게이가 독살당합니다.

 

이 후부터 테무친의 혹독한 시절이 시작됩니다.

어린 테무친이 족장이 되잔 부족민들은

배신을 하고 떠납니다.

 

이 때부터 “세상에는 배신하는 사람과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결국 얼마나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많이

얻는냐가 승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이후 테무친은 세력이 약해지자 타이치우드 족의 습격으로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수년간 고생하다 간신히 탈출하게 되고

그 뒤를 쫓는 추격대를 피해 물속에 숨어 있는데

추격대원 ‘치라운’이 못 본척 눈감아 줍니다.

 

이에 테무친은 ‘치라운’을 따라가는 과감한 선택을 하고

치라운은 테무친이 탈출하는 것을 돕는데

후에 칭기즈칸의 수하가 됩니다.

 

이 정도로 테무친은 대담한 판단력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하가 배신하지 않도록 만드는 능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점차 몽골고원에 이름이 퍼지면

조금식 세력을 모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징기즈칸의 결의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서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테무친의 사람들<인연>

 

인연1

첫 번째 부인 보르테의 아버지 ‘데이 세첸’은

테무친의 역량을 꿰뚫어보고 정혼의 약속과 의리를 지킴

 

연연2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의형제)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

 

인연3

테무친의 안다 ‘자무카’

(친구에서 라이벌의 관계)

 

‘의탁’에 엃힌 테무친의 비범함은?

 

테무친은 소규모나마 세력을 규합해

후원자(처가)를 찾아갔습니다.

 

식객이 아닌 거래관계로 생각했고

부학들의 존경과 충성을 확보해나갔습니다.

 

테무친은 항상 사람의 배경보다 능력을 믿었고

“씨족보다 동료, 형제보다 전우”가 우선이었습니다.

 

칭기즈칸의 누케르

테무친이 출신을 따지지 않고 끌어들인 전사들로

친위대의 핵을 이루며 아시아, 유럽 전선에서 활약

 

이 누케르 중 ‘제베’, ‘수부타이’

 

‘수부타이’

겨울철에 러시아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제베’

원래 칭기즈칸을 암살하려 했던 적군의 장수로서

의리와 능력을 높이 평가해 화살을 뜻하는

‘제베’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부하로 기용합니다.

 

둘 다 전략가로 제베의 부하가 수부타이였습니다.

 

처음 몽고군의 전략을 수립 체계화 한 사람이 제베

이후 유럽 전쟁에서 맹활약을 한 사람이 수부타이입니다.

 

이렇게 안목과 리더십이 컸던 칭기즈칸이었습니다.

 

승리보다 값진 패전 ‘굽타 산의 깃발 전투’

 

 

칭기즈칸에 대한 견제와 대립

 

칭기즈칸을 불안해 한 (케레이트 족)옹 칸의 아들들은

케레이트 족과 함께 배신을 합니다.

 

은밀히 암살.기습을 시도한

케레이트 족과 자무카 연합군 때문에

칭키즈칸은 한밤에 대 탈출을 강행합니다.

 

산악지대에서 따라잡혀 결국 전투가 일어나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 망구트 족 전사에게

칭기즈칸은 “굽타 산 정상에 내 깃발을 꽂아라”

명령합니다.

 

패배했다고 판단 도주를 막고 결사항전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해낸

칭키즈칸의 순간 판단력과

깃발을 꽂으라는 위험천만한 명령을 수행한 부하

그리고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운 부족들은

비록 이 싸움은 패배했을지라도

강한 동지애와 가능성을 보여준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소수로 다수를 이길 수 있다는

전술을 개발하게 되고, 내 편의 질을 높여 적을 이기게

한다는 개념을 부하들과 공유하게 된 것이

 

강한 몽골군을 탄생하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재기의 설욕전 ‘몽골고원 통일전쟁’

 

옹칸과의 설욕적이 시작되는데

먼저 케레이트 족을 격파하고

옹칸은 도주하지만 나이만 족에게 피습당하게 되고

나이만 족과 메르키트 족을 모두 격파하고

1206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몽골제국의 ‘칸’이되고

전술적 협렬을 통해 몇 배의 힘을 끌어내

몽골군은 ‘무패의 군대’로 진화합니다.

 

화약사용 이전 창, 칼, 활등이 사용된

냉병기 시절 군대의 사기는 최강의 무기였습니다.

 

 

 

몽골군의 무기

 

주력무기 각궁

 

 

짐승의 뿔, 힘줄, 나무 등 2가지 이상의 재료로

이어 붙여 만든 복합궁입니다.

주력병력이 기병이 사용했는데

기병 1인당 활2~3개 60발의 화살을 보유했습니다.

 

근접병기 ‘외날곡도

날이 휘어진 외날 검

 

 

짧은 손잡이 도끼. 블레이드형 철퇴

명중 시 강한 충격으로 주로 말 위에서

적의 머리나 무기, 말고삐를 쥔 적의 팔을

내리칠 때 사용

 

 

갑옷

금속제 찰갑(비늘 갑옷)을 입기도 했으나

주로 두정갑. 층상형(겹겹의 덧댄) 가죽 갑옷 선호

 

 

군화

군화안에 쇳조각을 덧대 발을 보호

 

 

칼칸

작고 둥근 방패

 

 

몽골군의 특징

 

부족군의 통제를 위한

 

1)연락병 체제

 

‘잠’이라 부르는 역참제도를 만들어

1,000km 밖의 군대 통제.지휘에 활용

 

50km마다 설치한 역참마다 약 400마리의

말을 대기시켰습니다.

 

제국의 끝과 끝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일종의

통신.우편망과 같았습니다.

 

2)규율

부족의 군대를 국가의 규율로 바꾸었습니다.

 

유목부족 군대의 특징은 전투 후 ‘약탈’이 특징이어서

전투 중 전리품 약탈에 쉽게 빠졌습니다.

 

이에 칭기즈칸은 약탈 금지령을 내리고 전투 후

약탈품을 공정분배하도록 합니다.

 

3> 편제

10명 아르밧

100명 자굿

1,000명 밍갓

10,000명 투맷

 

 

1명의 아르밧이 적에게 잡히면 9명이

가서 구해와야 하는 연대책임 구조였기 때문에

강한 결속력으로 뭉쳤습니다.

 

기동전 펼치는 기병에게는 주효한 편제 단위의

자율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칸에서부터 일개 부대원까지 명령 전달 체계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적의 앞선 전술이나 무기를

그대로 흡수해 활용합니다.

유럽에서 공성전이 벌어지면

중국인, 아랍인 공성기술자를 투입시켰습니다.

 

이렇다보니 몽골군은 제국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더 강해졌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자신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면서도

선진물물과 문화수용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연했습니다.

 

 

 

유목민족 기마병의 선결과제가 ‘목초지’였는데

제국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목초지를 찾기 어려워

말의 수가 제한되자 기병에서 중기병으로 편제가

추가 도입됩니다.

 

몽골 말은 작은 체구에 지구력이 좋은 것이 특징이어서

달리 때 위아래로 흔들림이 적어

기병의 피로도 역시 낮았습니다.

 

 

몽골군의 군마 선택 조건이

첫째가 말 젖이 나오는 암말이었습니다.

젓을 식량으로 사용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가 지구력이 좋은 거세마였습니다.

 

몽골군의 말 훈련법은?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평소 재갈을 물리지 않았고

목이 마른 망아지가 밤새 울부짖게 만들어

초원.고원에서 물을 찾도록 암말을 훈련시켰습니다.

 

아무거나 잘 먹고 풀뿌리 캐 먹도록

끓인 먹이를 주지않았고,

 

전력질주 후 3시간 동안

먹이나 물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기후. 지형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기 때문에 몽골군

뿐만 아니라 말도 거기에 적응이 필요했습니다.

 

공포에 밤에 울부짖는 말은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말의 흥분을 막고 조용히 시키는 훈련을 시킵니다.

 

정복전쟁에 나서다.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의 계기는 많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송나라 쇄국정책으로 실크로드가 막히자 파산 직전의

상인들이 전쟁을 부추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첫 상대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남쪽에는 남송이 있었으나 상업 받라을 위한

교역로 확보를 위해 서쪽을 택합니다.

 

서하를 정복하고 교역로를 따라가다 만난 생소한 상대

호라즘을 만납니다.

 

호라즘은 수도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아랄 해 남쪽에 자리한 투르크계 이슬람왕국으로

유목 기병의 힘과 동서 무역으로 쌓은 부를 거머쥐고 있었습니다.

 

처음 몽골의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안하지만 사신이 죽자

몽골군이 침략합니다.

 

호라즘 정복

호라즘 군대와 몽골군의 전투력 차이는?

호라즘에는 타지크 족 보병과 투르크 족 기병이 있고

병력은 약 40~45만 정도였습니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중기병 중심으로 병력에서는

몽골군을 앞섰습니다.

 

반면 몽골군의 기병은 약 12~15만명 정도였습니다.

 

처음 큰아들 주치가 이끄는 선봉대가

북쪽 길로 진격합니다.

 

진격 후 목초지를 모조리 불태우며 약탈을 합니다.

 

 

이에 호라즘 입장에서 강을 따라 약 500km의 방어선을 구축

했지만 북쪽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몇 개의 요새를 거점으로 방어구역을 선정

 

하지만 다시 북쪽 길로 재진격한 몽골군은

말 뿐만 아니라 낙타도 이용합니다.

 

병력을 분산시켜 1선 방어선을 뚫고 고원을 넘어 후방

남부를 습격하고 호라즘의 예비병력을 초토화 시킵니다.

 

또한 호라즘의 잘못된 판단이 분산된 몽골군에 대한

각개격파를 계획하지만 연락병 체계를 이용해

한 곳에 다시 집결합니다.

 

결국 500km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수도 사마르칸트만

남은 상황에서 호라즘 기병의 최정예 '캉글리 족' 5만명

이 포위되자 돌파 시도가 실패하자 닷새 만에 투항하지만

몰살시켜버립니다.

 

 

몇 있는 몽골군의 할살 중 하나가 바로 호라즘 학살입니다.

 

이런 무자비한 몽골군의 전과는 전 유럽에 퍼지고

대항없이 항복하는 성이 많았습니다.

 

몽골군의 서방 원정은?

 

중앙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진출합니다.

 

호라즘의 술탄 무하마드 2세는 카스피 해로 도망치게 되고

제배와 수부타이에게 추격 명령을 내립니다.

 

이는 도주하는 무하마드 2세를 갈까마귀 삼아

서방 원정 루트를 개척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에 제베와 수부타이를 앞세워

계속 정복전쟁이 이어집니다.

 

 

이상의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youtu.be/DtDht-xfw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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