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전쟁사_몽골제국의 정복전쟁 (러시아, 유럽, 이슬람 정복)

배움의 행복

세계사.전쟁사_몽골제국의 정복전쟁 (러시아, 유럽, 이슬람 정복)

notsun 2020. 6. 14. 00:01

서하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다

 

호라즘 제국 정복을 마친 칭기즈칸은

간쑤 성과 산시성 경계 육반산(류판산)에서

금나라 정복을 준비하다가 최후를 맞습니다.

 

죽음이 가까울 무렵 서하의 황제가

칭기즈칸을 찾아와

간쑤성, 산시성 일대를 다 비우고 떠날 테니

침략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이에  서하의 황제는 한 달의 유예기간 후 영토를

몽골에게 바치고 떠나기로 했는데

그 사이 칭기즈칸이 죽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깁니다.

" 내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 사람들이

성에서 나오면 모조리 학살해라."

그리고 그대로 실행됩니다.

 

평소 적대적이었던 서하인을 몰살해

위험요소를 미리 제거한 것이고

 

서방 원정 베이스캠프 완벽 확보를

고려해 지도에서 서하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칭기즈칸이 남기 유언

 

아들들이여~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마지막 여행을

할 때가 가까웠음을 알라

 

나는 하늘의 도움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1년이 걸리는 땅을 너희에게 남겨준다.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치켜세워주며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편안하고 풍요롭게 인생을 보내고

왕권을 향유하도록 하여라.

 

 

역사의 X-파일 칭기즈칸의 무덤

 

아직까지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풍문 1

미녀 40명, 명마 40마리부터 수백 명을

순장했다.

장례행렬 중 보이는 모든 생명체는 사살

 

풍문 2

무덤 위치를 감추기 위해

6,000㎡의 숲을 만들었다.

 

칭기즈칸의 후예 4명의 아들

 

칭기즈칸의 부인 500명으로

추정하고 자식이 많았을 것이지만

 

첫째 아내 보르테가 낳은

네 아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첫째 주치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당했던 보르테는

만삭의 몸으로 돌아와 큰아들 주치를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출생의혹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탁월한 용사로서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이러한 꼬리표 때문에 끝내 포기합니다.

 

둘째 차가타이

거친 전사로서 강했고

 

셋째 오고타이

온화한 성격에 포용력이 높았습니다.

 

막내 톨루이

쿠빌라이 칸의 아버지

 

몽골족의 전통이 아들 중 가장 능력 있는 자에게

부족장의 권리가 갔습니다.

 

결국 셋째 오고타이에게 부족장이 승계됩니다.

정복 이후에는 정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온순하고 정치력을 지는 오고타이가

2대 대칸으로 등극합니다.

 

 

 

 

금. 남송 정벌

 

몽골족을 가혹하게 억압했던 철천지원수 금나라를

치면서, 남송에 동맹을 제안합니다.

 

당시 남송은 '금'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난 상태여서

몽골과의 동맹에 찬성합니다.

 

 

원래 금나라는 전투에 강하고

기병. 보병 연합의 전술에 능한 여진족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차지하면서 용맹한 기운은

사라지고 군대도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금나라는 '삼봉산 전투' 패배와 더불어

 1234년 몽골-남송 연합군에 대패하고

 

도망친 금나라 황제 애종을 자살로

금나라가 멸망합니다.

 

이렇게 남송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몽골군은

약탈 후 다시 돌아갈 것으로 예상하고

몽골군이 잠시 물러간 화베이를 되찾은 남송은

약 한 달간 승전의 파티를 엽니다.

 

이후 막내 툴루이 아들 쿠빌라이

남송 정벌에 나섭니다.

 

처음 '악주'로 진격하려 했으나(양쯔강이 넓어 )

당시 몽골에 투항한

남송의 장수 유정의 전략을 받아들여

 

양양성을 먼저 공격. 점령 후 배를 타고

수도로 진격하는 작전으로 바꿉니다.

 

 

몽골군은 한족 출신의 수군을 동원하여

4~5년에 치 양양성 포위전을 합니다.

 

남송도 약 2천 척, 10만 대군을 동원한 수차례

후방 공격을 하지만 몽골군의 포위 벽은

뚫리지 않습니다.

 

칭기즈칸 이전 몽골족 최고의 용사는

물불 안 가리는 '돌격형'이었다면

 

칭기즈칸은 다혈질의 돌격형에게는 군수품 관리로

직책을 바꿔버렸습니다.

 

따라서 칭기즈칸이 등용한 전투 지휘관의 조건은

용맹함, 두뇌, 인내심과 현장 판단력

이었습니다.

 

기병으로 유명하지만 '공성전'에서도 능했고

당시 신형 투석기 등 신 무기에 대한 수용도

적극적이어서 몽고군의 무기를

"말과 활 빼고 모두 외국 무기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양양성 함락 이후 약 50여 년간 몽골에 항거한

남송은 패망의 길에 접어듭니다.

 

몽골군 vs 유럽 무기는?

 

유럽 군대

 

중무장한 중기병의 시대

 

 

주력 근접 병기 '롱 소드'

담금질로 검의 강도를 높였으나

검의 표면만 강화하는 수준

 

 

기병용 창

랜스(긴 삼각 송곳 같은 생김새, 손을 보호하는 갓

모양의 '뱀플레이트'가 특징)

 

 

윙드 스피어

(창 날이 깊이 박히지 않도록 제작)

 

 

철퇴 메이스

부가적으로 무장한 타격 무기

다양한 형태의 철퇴 사용

 

 

호즈맨즈 플레일

(쇠도리깨)

 

 

 

 

 

갑옷

사슬 갑옷 '에인 메일'안에 솜으로 누벼 만든

섬유 갑옷 '아퀘튼'을 덧대 입어 충격 완화 시킴

 

 

말 갑옷

충격을 주는 전투 방식으로 말에게도

무거운 갑옷을 입힘

 

 

방패 카이트 실드

역삼각형을 길게 늘린 형태로 말을 탔을 때

무방비가 되는 하반신을 방어하는데 효과적

 

 

투구

(헬름. 그레이트 헬름)

통기성을 위해 입 주변에 구멍이 뚫려있고

투구 윗면은 평평한 경우가 많았음.

 


 

몽골군

 

공성무기

(투석기, 노포<캐터필트>, 높은 누대)

아랍에서 전파된 무기를

13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 사용

 

 

러시아 정벌

 

원정군 총책임자는 바투,

총지휘관은 '수부타이'였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영토는 넓었지만

크고 작은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주력군 '스메르디'는

거의 농민군 수준의 민병대였습니다.

 

 

 

 

또한 훈련도가 낮아서 단순히

육중하고 거대한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인해전술 작전이 전부였습니다.

 

 

중기병 '드루지나'가 있었는데

용맹하나 전술적 역량은 부족했습니다.

 

 

그럼 혹독한 러시아의 자연환경

앞에서 몽골군은 어떻게 전쟁했을까요?

 

사실 몽골군은 겨울에 땅이 굳어지는 것을

오히려 더 좋아했고 몽골 역시

겨울에는 영하 50도의 혹한의 추위여서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얼은 땅이 녹아 진창으로 변하는 봄이 되면

침략을 멈추고 돌아갔습니다.

 

'칼가 강 전투'

1223년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연합군과

몽골군이 맞붙게 됩니다.

 

처음 몽골군을 접한 러시아 중기병 드루지나는

몽골군의 초라한 행색에 얕잡아 봤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항상 몽골군의 위장 유인 전술인

'망구다이'에 휘말려 매번 참패당합니다.

 

또한 몽골군의 전격전 속도를 몰랐던 러시아군은

약 20만 대군을 동원 강변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

이미 몽골군은 러시아군 배후까지

장악. 포위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시트 강 전투는 처참하게 패하고

왕까지 죽게 됩니다.

 

이후

키예프까지 함락되고 학살과 도시가 초토화되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중심이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를 빼앗은 나라가

몽골이었으며 이를 가능케 한 몽골의 전술의

핵심은 전격전, 분진 합공이었습니다.

 

 

 

 

유럽 정벌

 

1. 폴란드

러시아 함락 소식을 들은 폴란드는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도 모집하며 대비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헨리크 2세가 지휘한 폴란드 연합군은

레그니차 전투에서 참패합니다.

 

당시 몽골군은 소년들로 서방 원정을 꾸렸는데

13~15세 소년을 징집한 이유는

워낙 전장이 멀리 있어 가는데만 1~2년이

걸렸고 훈련을 하면서 갔습니다.

 

또한 당시 전리품이 몽골군의 역참제도로

자기 집에 전달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군인의 길은 어린 소년들에게

성공의 상징이고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2. 헝가리

 

폴란드 정복 이후 헝가리로 향하는데

야간에 사요 강을 건너던 바투의 부대는 헝가리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야간이어서 활을 겨냥하기 어려웠고, 배수진이 되어버린

강 때문에 기동전을 펼치지 못한 몽골군은 고전 후

철수하게 됩니다.

 

헝가리군도 당시 몽골군의 전략을 들어왔던지라

다시 본진으로 돌아가 보급에 쓰는 수레를

연결하고 진지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몽골군의 유인책에 말려 추격에 나서고

결국 헝가리군은 전멸합니다.

 

3. 이탈리아 북부, 오스트리아

 

유럽의 끝까지 정찰을 하지만

갑자기 몽골군이 철수하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오고타이 칸'의 사망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럽인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겨서

몽골군이 물러갔다고 생각했습니다.

 

18세기 영국 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오스트리아에서 기사 50명과 석궁 20정을 든 병사들이

몽골군을 물리친 작은 성과를 두고

프랑크인의 용맹함이 몽골군 철수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슬람 원정

 

당시 이슬람 왕 칼리프에서 몽골군이 항복을 권하지만

전쟁을 하게 되고 단 5일 만에 함락당하고

몽골군은 바그다드 도시를 대학살 합니다.

 

'어새신'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 이슬람 분파

수직 절벽 위에 근거지를 조성하고

하산 이 사바는

급진 분파 아사신파를 창시합니다.

 

 

아사신파의 지도자 '산의 노인'(산중 노인)은

암살단을 양성하며 스스로를

피다이(fidai) '열성 신도'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곳곳으로 퍼져나가 정착하며 지시에

따른 50건이 넘는 암살을 자행합니다.

 

근거지가 험준한 협곡에 있어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로 어느 군대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신비 교단 조직에서

평범한 왕국처럼 변질되고 몽골군이 침입하자

  아사신파 일부 세력이 투항하게 되고

결국 몽골군에 처형. 무너지게 됩니다.

 

중국을 둘러싼 판세 변화

 

4대 몽케 칸의 뒤를 이은 몽골제국의 5대 칸

쿠빌라이는

 

쿠빌라이는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한화 정책을 사용합니다.

 

반면 몽골 문명을 고수하려는 쿠빌라이의 동생

'아리크부카'와의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결국 내전이 벌어지고 쿠빌라이가 이깁니다.

 

 

내전 승리 후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권을 지닌 칸국들이 만들어집니다.

 

워낙 지역과 문명이 다른 곳에 만들어진 칸 국들은

결국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이후 멸망하게 됩니다.

 

 

몽골군 서방원정의 제약이 또한

화약무기 시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몽골 정복 전쟁의 의미는?

 

몽골군의 통치 이념은 정복되었지만

기존의 문화와 자치권을 최대한 인정해 주었습니다.

 

몽골이 세운 나라들이 고작 1~200년 정도만 유지되었지만

오히려 현지화되고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커다란 여러 개의 국가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목문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이 희미해지고

현재에 안주한 결과로 200년 정도까지의 역사가

전부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youtu.be/-LVCtbWaM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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