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전쟁사_카이사르

배움의 행복

세계사.전쟁사_카이사르

notsun 2020. 5. 21. 00:16

"로마는 세계를 3번 통일했다."

 

정치, 종교, 로마법 으로...

공화정체제, 기독교 제국의 시작, 중세 유럽에 계승된

로마법 등 서양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이런 로마제국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 있습니다.

 

 

 

 

독일어 황제 '카이저'의 어원

러시아 황제 '차르'의 어원인

 

카이사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의 정세는?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오랜 전란으로 황폐화

자영농 몰락

귀족 지주들의 대농장(라티푼디움)발달

 

그리고 직업군인 제도가 생겨나고

해외 정복. 영토 확장을 위해

노예 노동력이 유입됩니다.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로 유입되게 되고

자연스럽게 도시 빈민이 증가하고

이들의 식량은 귀족들이 제공합니다.

 

결국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등 권력의 분리와

견제. 균형에 중점을 둔 복합정치제제

엘리트 정치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로마는 귀족파와 평민파로 분리되고

두 세력 사이에 분쟁도 일어납니다.

 

제1차 삼두정치

 

로마 공화정 말기 제1차

삼두정치가 출현합니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정치가. 군인

젊은 시절부터 참전한 당대 최고의 군사 영웅

혼인동맹으로 카이사르 딸 율리아와 결혼

 

 

 

크라수스

대표적 부호로 스파르타쿠스 진압 장본인

정치적 야망은 크나 군사적 재능을 부족

 

 

 

 

원래 2인의 집정관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사이의 관계를 화해시키고 카이사르가

끼여들면서 삼두 정치가 시작됩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떠난 배경은?

 

삼두정치 도중 카이사르가 자리를 비우고

원정을 떠납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빚쟁이였습니다.

술.여자.도박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민원을

자신의 빚으로 해결해 주기 까지 했습니다.

 

군사적 명성을 쌓기 위해 원정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와 인접한 갈리아 부족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어 가능한 전쟁을 피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강 전투력으로 갈리아 통일을 꿈꿨던

스위스 원주민 헬베티 족의 대규모 이동은 로마 팽창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카이사르는 생각했습니다.

 

 

 

 

스위스의 전투력은 중세때 까지도 명성을

떨쳤고, 바티칸 파견와 루이 16세 경호도 맡았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갈리아에 통일의 움직임이 있다.

로마가 먼저 정복해야 한다."고 카이사르는 주장하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전쟁에서는 1차 투창 공격으로 방패를 놓친 헬베티

족을 돌격하는 전술로 승리하고 스위스로 쫓아냅니다.

 

 이 모든 것이 시대 흐름의 변화를 포착한

카이사르의 통찰력에서 비롯되 원정이었습니다.

 

브리타이아(영국) 침공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도 약 34km의

도버해협을 못 건너갔지만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정복에 나섰습니다.

 

기존 전술을 바꿔 브리타니아 연합군의

'hit and run' 전술을 기병으로 막아 반격했고

 

고대전의 '라인 전투'의 형태에서도

열 맞춰 그룹별 로테이션으로 체력을 안배하면서

체력이 좋은 갈리아군과 효율적으로 싸웠습니다.

 

 

 

 

이러한 잘 짜여진 그룹 전투에서도 순간순간

융통성을 잘 발휘해서 유연한 대형 변화를

유지했습니다.

 

 

 

카이사르를 괴롭힌 갈리아 영웅은?

 

로마군의 전술을 분석하고 배운 갈리아 전사들은

갈리아의 패인을 연구합니다.

 

 

 

 

패인의 원인이

1. 부족 간의 단합 실패

(부족간 이해관계가 엇갈림)

2. 조직력과 저술 벤치마킹 단기간 내 불가능

을 알고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 간의

단합 및 총궐기를 주도합니다.

 

당시 로마군의 약점은

1. 기병보다 느린 보병 중심

2. 적은 병력

3. 군량 보급 문제 였습니다.

 

이에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중에서 보급을 마비시키기 위해

"로마군의 군량을 대는 갈리아 부족을 배신시켜라"

라고 회유책을 사용합니다.

 

 

 

 

이후 고립된 로마군을 빠른 기병으로 둘러싼 후

식량 구하러 흩어지면 각개격파가

전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카이사르는 진퇴양난에 봉착하지만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도시 아바리쿰을 습격.함락시키고

4만명의 주민을 학살함으로써 군량 문제를

간신히 해결하게 됩니다.

 

이에 차선책으로 '알레시아 요새'를 택해 로마군에게

스스로 포위가 됩니다.

 

그리고 농성하면서 전 갈리아 부족이 카이사르에게

맞서 싸우도록 호소합니다.

 

 

 

 

요새를 둘러싼 로마군 배후를 각지에서 모여 든

갈리아 증원군이 포위하게 되고

 

 

 

 

이에 로마군은 양면으로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당시 로마군의 완벽한 진지 구성(표준화)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처럼 도넛처럼 포위된 채 치른 양면 전투가

바로 '알레시아 공방전'입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연합군의 파상공격에 맞서 높은 망루에

올라 전투를 지휘하고 적재적소 지원군을

보내 기동 방어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능력을 한계치 이상

끌어냈으며, 갈리아 원정 대장정의 막을 내린

공방전이었습니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장점을 엿볼 수 있는데

항상 대안을 제시하며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병사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갈리아 연합군을 물러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합니다.

 

 

 

 

이후 포로가 되어 로마로 압송후 내전이

모두 끝나고 치러진 개선식 후에 화형 당합니다.

 

알레시아 패전 후 로마의 속주가 된 갈리아

 

카이사를 원정군은 승전이후 갈리아인을 노예로 삼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카이사르는 모든 빚을 탕감하고

엄청난 부를 거머쥡니다.

 

갈리아에 찾아든 로마의 돈과 문명의 혜택으로

로마 문화에 동화(同化)가 되어버립니다.

로마는 칼의 힘과 더불어 문명의 힘도 알았기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갈리아 원정 이후 로마 권력의 방향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서 성공하자

3두 정치인 중 하나인 크라수스는 군사적 업적을

쌓기 위해 오늘날 이란 북동부 근거리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사망합니다.

 

다른 한명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이 사망하자 카이사르와 다시

라이벌이 됩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 당시

불문율이었으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결탁한 원로원이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을 내리자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말합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의 신속한 진격에 비해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대응이 느린 대처로

 

결국 로마를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고 그리스까지 도망갑니다.

 

로마 해군의 제왕답게 그리스에서 세력을 규합한

폼페이우스와 전투가 벌어집니다.

 

'파르살루스 전투'는 폼페이우스의 군에 비해

규모가 훨씬 적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정예 고참 병력 2천 명의

카이사르 별동대를 편성하고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도발해 작전지역으로 유인합니다.

 

여기서 투창을 날리는 별동대와 배후의 기병대로

폼페이우스 기병대는 포위되고 무력화됩니다.

 

기병이 무너지가 카이사르의 주력군이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포위 섬멸하게 되는데 대신 카이사르의

군대 전사자는 약 2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이집트로 피신한 폼페이우스는

당시 왕인 피톨레이마오스 13세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살해를 빌미로 이집트를 평정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파라오에 앉히고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율리우스 카이스르라는 인물은?

 

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은 개혁가로서

외모는 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인류 최초로 한 업적들 중

동전 주화에 자신이 흉상을 새겼습니다.

 

 

 

 

모두가 한니발의 장점을 벤치마킹할 때

한니발의 한계까지 뛰어넘으려 노력했고

 

키케로의 스승 몰론을 찾아가 수사학(설득의 기술)

을 공부하였습니다.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정치력도 대단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은 검소하면서 약탈한 재물은

부하들에게 나눠준 반면

 

카이사르는 자기의 야망을 숨기지 않고

자신도 펑펑쓰고, 부하들에게도 펑펑 나눠줬습니다.

 

 

 

 

 

 

 

항상 로마의 내일을 준비했던

미래지향적 리더였습니다.

 

카이사르와 이후 로마 황제들도 개인재산으로 포룸을

건설하였습니다.

 

 

 

 

로마인에게 제국 마인드를

심어주고 로마의 방어선인 세르비우스 성벽까지도

허물었습니다.

 

왜 카이사르의 부하들은 그를 배신했나?

 

카이사르는 마지막에 암살되어 죽습니다.

 

 

 

 

그 중에는 갈리아 원정 군단장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브루투스는 황제가 되려고 죽였다고 하지만

살해 이후 아무 계획이 없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암살에 대해 호응해 주리라 여겼지만

오히려 시민들로 부터 거센 역풍을 맞았습니다.

 

결국 배신이라는 비극으로 파란만장했던

영웅의 삶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상은 아래 영상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youtu.be/la0TIVhQP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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