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전쟁사_ 포에니 전쟁(카르타고 vs 로마, 한니발의 활약)

배움의 행복

세계사. 전쟁사_ 포에니 전쟁(카르타고 vs 로마, 한니발의 활약)

notsun 2020. 5. 17. 01:12

로마의 첫 전쟁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120여년 동안의

카르타고 vs 로마 포에니 전쟁입니다.

 

페니키아

 

'포에니'는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을 가리킨

라틴어로 카르타고를 '포에니'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어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

 

'페니키아'는 알파벳의 원형인 페니키아 문자를 만든

민족으로서 고대 무역상으로 유명합니다.

 

 

고대에는 이집트 문명이 가장 앞섰는데 이 문명을

페니키아가 그리스로 전파한 것으로

문화, 종교,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 이릅니다.

 

 

돈 버는 일에 능했던 페니키아인은

부족한 식량은 무역이나 노예에게 농사를 시키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위한 항구도시에

중심으로 나라를 세웁니다.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카르타고가 지중해 요소요소에 도시를

만들었으나 로마가 지중해 무역 거점도시를

탐내기 시작합니다.

 

 

완전농업국가 스파르트와는 달리

무역도 하는 농업국가 였던 로마는

부 축척을 위해 해상무역에 나섰으나

카르타고가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반면 제국의 꿈을 꾸기 시작한 카르타고와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로마의 군사력 강화 계기

 

초기 로마는 지주들만 군인으로 참전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켈트족 침입으로 로마는 대대적인

편제 와 전술 보완 등 군 혁신을 실현합니다.

 

 

로마의 군대 훈련법

1. 30kg 완전군장 5시간 3km 행군 주파

2. 2배 무거운 훈련용 무기로 근력.민첩성 강화

 

 

 

 

무기 비교

 

지상전의 강자 로마

vs

해상전의 강자 카르타고

 

로마군

 

로마는 하스타티, 벨리테스,

트리아리, 프린키페스로 구성

 

 

전투가 시작되면 벨리테스가 투창으로 적의 대열을

흩뜨려 놓은 뒤 하스타티와 트리아리가 백병전을

펼쳐 적의 체력을 소모시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프린키페스가 돌격하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로마군 갑옷과 투구

 

뺨 가리개'버컬러'와 목보호대를 장착한 것이

특징입니다.

 

방패, 스큐툼

 

근접용 무기 글라디우스

 

 

투창 필룸

적에게 맞거나 방패에 튕기면 휘어져

재사용이 불가능했습니다.

 

카르타고군

 

여러 민족과 용병으로 구성되어

훈련이 부족했습니다.

 

지상전의 최강자 스파르트 출신의 크산티프스

지도 아래 강력한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와 전술은 과거 마케도니아 군대의 것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했습니다.

 

카르타고의 최강 전력은

누미디아 기병이었습니다.

 

 

지중해 최강자 카르타고 해군

 

5단 ~ 16단 다단노선의 등장으로

함선이 거대화되면서 대형 화살 등을 발사하는

원거리 공격무기 '발리스타'나 투석기도 탑재되어

있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인공 군항

 

 

충각 돌격, 선상 백병전이 주 전술

 

이런 강력한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칠

로마의 신무기 등장합니다.

 

 

 

 

핵심인물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vs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

 

 

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가

로마에 패하고

 

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스키피오 아버지가

한니발에게 패할 때 아들 스키피오가

아버지 스키피오를 구출합니다.

 

그리고 스키피오는 다시 힘을 키워 돌아와

한니발의 두 동생을 죽입니다.

 

 

그리고 두 명장이 맞붙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은?

 

지중해 중심의 카르타고 영역을

'시칠리아 섬'까지 확장하려하자 이에

로마가 견제를 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의 전쟁 목표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를 축출하고

더불어 지중해까지 장학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어떻게 카르타고 해군을 이겼을까?

 

당시 카르타고 배는 5단 노선(노는 3열 노꾼은 5단)으로

둘 이상의 노꾼이 하나의 노를 같이 잡고 저어

추진력이 높았습니다.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는 로마 해군의 신무기

'까마귀'을 발명하여 적군의 함대로

넘어가 백병전으로 무찔렀습니다.

 

'까마귀'의 길이가 길어 카르타고의 배가

근접하면 바로 끝단의 갈고리로 찍어 눌러

적의 배를 고정시키고 넘어가

로마군의 자랑 백병전으로 승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함선은 정규전 대비에

부족한 해적 소탕용 정도였습니다.

 

반면 로마군 함선은 전투 병력이 50~100명 까지

탑승할 수 있어서 까마귀로 건너는 동안도

투창과 대형 쇠뇌 '발리스타'로 공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에 불리한 정도에서

종전이 됩니다.

패전국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양도와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이후 조약에서 언급도 없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양여합니다.

 

카르타고의 육군 양성

 

포에니 전쟁의 특징은 '벤치마킹' 전쟁이었습니다.

1차 패전 후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육군 양성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밀카르는 스페인으로 넘어가

영토 개척 및 원주민 정복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최고의 군대를 양성합니다.

 

이런 카르타고 군 양성을 견제한 로마는

자객을 보내 하밀카르를 살해하지만

그의 아들 한니발이 아버지가 키운 군대를 이끌고

로마 정복 원정길에 오릅니다.

 

 

 

 

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

 

한니발은 나폴레옹보다 2천년 앞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공격합니다.

 

 

 굳이 육로를 이용한 이유는 1차 패전으로 로마에 해상

제해권을 빼앗겨 해로가 막혔기 때문에

험준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한니발 원정길에는 37마리의 코끼리도 넘어가는데

어렵게 끌고간 이유가 코끼리는 지금의

탱크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니발의 로마원정 전략 목표는?

 

1> 로마와 정적인 갈리아족을 아군으로 포섭해

함게 싸우게 하라

 

2> 과거 로마에 정복당한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드게 싸우게 하라

였습니다.

 

 

두 가지였는데, 코끼리 군단이 갈리아족에게

위압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원정 중 곳곳의 갈리아족을  포섭 및 진압하면서

알프스 산맥으로 행군했습니다.

 

어렵게 로마에 도착하지만 원정대는 많은

손실을 이미 입은 후 였습니다.

 

 

대부분의 전력손실 상태에서 로마와 전쟁?

 

약 1/4 밖에 안 남은 병력은 이미 실패와 다름없는

원정이었습니다.

 

여기서 한비발의 전술적 천재성이 발휘됩니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즉흥적으로 전술을 운용하는

것이 특징으로 게릴라전술을 사용합니다.

 

이런 즉흥적 전술에 휘말려 수세에 몰린 로마군은

그래도 워낙 강한 군대여서 다소 훈련이 덜 된 갈리아족

적진을 향해 돌파 후 후퇴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새 지휘관 파비우스는

지연전을 펼치면 승리할 것으로 판단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지연전보다는 전면전을 거행하라고

명령합니다.

 

한니발이 로마로 진격하면서 파비우스의 영지만

제외하고 약탈을 한 이유도 원로원에서 파비우스를

의심하도록 하는 치밀함까지 보였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이미 로마의 전략을 간파하고 전면전을

펼칠 수 있도록 상황을 유도한 것입니다.

 

섬멸전의 교본, 칸나에 전투

 

이 칸나에 전투로 한니발은 영웅에서

전설이 됩니다.

 

당시 로마군 지휘관은 파울루스와 타렌티우스 바로

였습니다.

 

파울루스는 신중한 성격으로 평원에서 절대 한니발과

전투하지 않으려 했고,

타렌티우스는 군대 경험도 없으면서 자신감만

충만한 스타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병력은

보병 8만, 기병 7천명이었고

카르타고는

당연히 열세였지만 갈리아족의 포섭으로

보병 4만 기병 8천명이었습니다.

 

바로가 지위하는 날 한니발을 기회로 보고

공격해서 유명한 '초승달 전술'을 사용합니다.

 

 

이기고 있다고 착각한 바로는

'2진이 1진의 틈을 더 메워 중앙 돌파' 하도록

명령하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결국 카르타고의 기병이 완전 포위하게되고

한니발 부대의 일방적 학살이 시작됩니다.

 

 

양파껍질 벗겨내듯 외곽부터 죽여서 섬멸하기

시작했고 결국 로마는 참패해서

약 6만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때 유일하게 탈출한 부대가 있었는데

바로 스키피오의 기병부대였습니다.

 

왜 한니발은 로마시를 점령하지 않았을까?

 

약 15년동안 한니발은 로마를 들어가지 않고

외곽 지역으로만 맴돌았습니다.

 

한니발의 로마 원정 목표는 "로마 동맹들을

이탈시켜 전쟁에서 승리한다" 였기 때문에

포로도 로마군은 다 죽이지만 주변 동맹국

출신은 아마 댓가 없이 다 석방합니다.

 

하지만 로마도 정치적 신의 한수를 부리는데

바로 '시민권 부여'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10년간 노예 생활 후 신분 변경이

가능한 노예 면제법이 있었는데 자녀는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런 시민권 부여로 동맹국의 이탈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동맹국의 이탈이 없어 한니발은 당황하게 되었거

당시 본국에서 지원도 없었습니다.

 

 

 

 

로마의 벤치마킹 전략은?

몇백년간 이어진 로마의 속담에

"한니발이 성문 앞에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기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도 한니발을 벤치마킹해서

카르타고로 원정을 떠나자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로마도 어렵지만 카리타고의 식민지 스페인으로

스키피오家가 원정을 떠납니다.

 

이 원정에서 아버지, 삼춘 스키피오가 전사하고

아들이 다시 가서 휩쓰는데

 

아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수제자라고 말 할 정도로

한니발 전술의 원리를 제대로 벤치마킹해서

현장에 응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한니발의 장점인 유연성 있는 전술 운용법을 터득해

스페인원정에서 카르타고군을 격파합니다.

 

그리고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할 것을 결심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처럼 유력한 배후지만 치는 것이

아니라 본거지를 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카르타고 의회에서는 한니발

소환을 명령하고 바닷길을 통해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옵니다.

 

당시 한니발의 병력은 보병 1.5만명과

기병 2천명이 전부였습니다.

 

카르타고에 도착한 한니발은 평원에서의 전투는

피하고, 원활한 보급만 있는 승산 있는 전투만 치룹니다.

 

하지만 칸나에 전투 때의 로마군 입장이 한니발 군에

그대로 재연되어 전쟁 재촉을 받습니다.

 

스키피오는 이것을 노렸습니다.

 

로마군이 칸나에 전투에서 패한 원인은 정치적

판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카르타고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자마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한지발이 협상을 시도하지만

스키피오는 거부합니다.

 

스키피오는 완벽하게 자마 섬멸전을 꿈꾸고

한니발을 전멸시킬 장소를 고릅니다.

 

(자마)평원을 고르고 스키피오의 양익포위술을 예상한

스키피오는 절반이라도 한니발 군대를 에워싸는

기동전으로 대응을 준비합니다.

 

결국 카르타고는 괴멸하고 한니발은 탈출합니다.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는 평화조약을 통해

1>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2>해외식민지 전부를 로마에 양도합니다.

 

워낙 카르타고는 역량이 있던 터라 50년간의

전쟁배상금을 30년 만에 모두 선납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카르타고는 부국이었으며

세계 최초의 아파트를 건설한 것도 이곳입니다.

 

또한 당시 방수공법(진흙+조개껍데기)을 개발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로마에 유린당합니다.

 

인물 탐구

포에니전쟁의 양대산맥

한니발 vs 스키피오

 

 

한니발

로마인 입장에서 잔인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군인으로서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병사들과의 관계, 검술, 밑바닥부터 시작한 경험

을 갖춘 완벽한 군인의 모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5년 동안 이탈리아 원정에서 단 한명의

탈영병도 없었습니다.

 

스키피오

한니발의 전술 원리를 이해해 응요하고 창조할 줄 안 인물로

반면 사생활은 놀고 여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자마 전투 이후 두 인물은?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패한 뒤 소아시아로 도망가고

로마가 끝까지 추격하지만 비티니아 왕국으로 망명하지만

로마가 신변인도를 요청하자 자살합니다.

 

스키피오는 정적들의 뇌물죄 고발로 배신감을 느껴

로마를 떠났고, 병으로 사망한 스키피오는 자신의 장례를

로마에서 치르지 못하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공교롭게도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같은 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이유?

 

2차 포에니 전쟁 후  맺은 강화조양 중에는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할 수 없다."

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를 호시탐탐 노리던 누미디아가

공격하자 카르타고가 맞서게 됩니다.

 

이에 강화조약 위반의 빌미로 삼은 로마는 침공하자

카르타고가 협상에 나섰고 로마의 협상 조건은

"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로마에

넘겨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은 철수하지 않자 카르타고는 최후 결단

으로 성안에서 농성전에 돌입하고 보급이 단절된

상태에서 무려 3년간 버팁니다.

 

카르타고는 심지어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활 시위로

사용될 정도로 결사 항전했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20만의 시민을 학살하고

남은 5만도 노예로 끌려가고

땅에 소금을 뿌려 불로지로 만들어버립니다.

 

이상의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youtu.be/s6EFhtEEh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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