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쟁사_임진왜란1

배움의 행복

역사. 전쟁사_임진왜란1

notsun 2020. 3. 23. 21:03

 

조선의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임진왜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결국 조선으로 향해 약 700정의 배를 이끌고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침략합니다.

 

'정명가도'의 허울을 앞세운

약 20만의 일본군은

약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합니다.

 

강화협상이 결렬된 후

1597년 2차 침략인 정유재란이 일어남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 함으로써

전세를 바꾼 해전의 승리

 

 

 

 

"16세기 조선. 명나라. 일본의 정세는?"

 

1> 명나라

13대 신종 시대 중반부터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2>일본

 

거듭되는 내전 속에 사회.정치적 변동이 컸던 전국시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시대 종식

전국 통일로 생산량, 무역 증가로 국력이 성장한 일본

 

전국시대 100년 동안 신무기 수입 및 전술연마로 군사력 성장

조총 뿐만 아니라 대규모 집단 전투에 유용한 진법(陳法)이 발달합니다.

 

또한 실전 훈련이 잘되어 있던 상태의

대규모 병력을 보유한 세계 최강으로

임진왜란 출병 15만의 보병은 최정예 수준이었습니다.

 

동남아까지 선전포고문을 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

 

 

 

 

3>조선

 

1590년 조선 침략 탐지 목적으로

150년만에 조선통신사(동인과 서인)를 일본에 보냈지만

농업국가 조선의 시선(협소하고 고지식한)으로

일본을 바라본 통신사 일해의 불협화음과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통찰력이 부족했습니다.

 

일본의 1) 전쟁수행 능력 유무와

2) 국민들의 전쟁지지 여론 등의

구조 파악에 실패한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에서 국서를 보내

조선 침략 예고까지 했으나

그 상황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군사제도 한계"

 

조선 군사제도의 근간은 부병제(예비군제도)다 보니

임진왜란 당시

보병.기병.포병 등 편제 비율이 맞지않아

제식훈련만 실시한 수준이었습니다.

 

조선도 편제를 해서 훈련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열악한 재정으로 유명무실해진 편제 훈련

 

당시 조선은 자비로 군비를 부담하고,

부자는 군역에 나가고

가난한 자는 군역에 나간 병사의 농토에서 일하거나

군비를 지원하는 봉족으로 배속시켰습니다.

 

조선 왕조가 부패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것이 아니라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대신 일본은 군인(군사력)과 농민(경제력) 계급이 따로 존재했습니다.

 

 

 

 

 

" 일본 무기 VS 조선 무기 "

 

1) 일본 무기

 

카타나, 타치(날길이 90cm이상. 조선군 손목부상 야기)

나기나타 (언월도.기병이나 근접전에 유리)

 

창(스야리)

 2~3m 길이의 가볍고 단단한 창. 조선창보다 길어 돌격전 유리

 

조총

포르투칼에서 전래된 화승총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한 신무기

최대 사거리 300~700m, 유효사거리 100m 내외

하지만 발사과정이 복잡. 분당 2발 미만이며

물에 젖으면 사용이 불가 했습니다.

 

 

 

 

2) 조선 무기

 

활(각궁)

사거리 300m, 영국의 장궁도 200m 내외였습니다.

일부 사학자는' 초반 조총의 공포만 없었으면 조총에 맞써 싸워볼 만 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활보다 빠르고 위력적인 조총의 탄환 때문

갑옷을 뚤고 치명적 상처를 냈습니다.

 

승자총통

보통 15개 쇠구슬 발사, 최대사거리 800m, 유효사거리 150m

명중률 높이기 위해 20m이내 공성전서 활약

 

 

 

 

신기전

현대판 방사포

사거리 250m, 적에게 공포감을 주는 광역 제압 무기

다만 화약의 소모량이 지나치게 많았습니다.

 

비격진천뢰

조선군 최강무기

내부에 화약과 철 조각을 장전한 일종의 시한폭탄

 

 

 

 

 

일본군의 전략

 

부산 ~ 한양까지 일본군의 행군속도는

1일 평균 약 20km였습니다.

 

이렇게 빨리 진행한 이유는

 

이미 조선의 전략.전술을 다 파악했던 일본은

조선군의 2진 방어망이 갖춰지기 전에 속전속결의 기습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 다이묘(영주)만 잡으면 승리하는 방식이어서

한양의 왕만 잡으려고 속전속결을 펼친 것입니다.

 

 

 

 

 

일본군의 진격

 

선조는 신립장군을 삼도 순변사로 임명

전세를 역전하고자 했습니다.

 

신립장군의 궁기병 vs 고니시 유키나가 조총부대

결과는 조선군의 대패~

 

아직도 신립장군이

전장을 탄금대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한양으로 가는 최후의 방어선은 이렇게 무너집니다.

 

1952.4.30 선조 몽진에 오르다.

명나라도 일방적인 초반 전체에 의심을 했다고 합니다.

 

 

패전 후 자결한 탄금대

 

 

 

 

명나라 참전

 

당시 명은 조선이 무너지고 일본이 후금(청)과 연합하면

명이 위험하다는 위기론이 돌고 있었습니다.

 

단지 조선과의 친화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결국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막아야 했습니다.

(일본을 조선에서 저지하자!)

 

1952. 6월 5천 명나라 군사 1차 파병 후

 이여송의 5만 대군을 2차 파병합니다.

 

하지만 자만심에 빠진 명나라는 일본군에 패합니다.

그래서 왜구 전문부대인

척계광의 '절강성 부대'가 파병됩니다.

 

이 부대가 들고온 무기

낭선(죽창)과 삼지창

무기 축에도 못 끼는 죽창과 삼지창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을

들고 있어 황당해 했다고 합니다.

 

'원앙진'

(백병전에 능한 왜구에 대항해 병사 12명이

한몸이 되어 싸우는 집법으로 )

사무라이에 맞서는 전법을 사용했습니다.

동작을 12개로 나누어 각자 개인이 한 동작만 계속 하게 만든 것입니다.

 

 

 

 

조.명 연합군의 진격

 

빼앗긴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한 3차례의 전투

 

1593.1 3일간 이어진 조.명 연합군의 총공세

마침내 고니시 부대는 항복을 선언하고 철수합니다.

 

 

 

 

 

행주대첩의 기적적인 승리

행주대첩(1593.2)의 명장 권율 장군

 

일본군 약 3만명 vs 조선군 약1만명(지원군, 의병 포함)

석회와 재의 발열반응을 활용한 화학전술 사용되고

배 2척에 화살 수만 개를 실은 후방 지원군까지 합세합니다.

(일본군은 이 배를 조선 수군으로 착각하고 후퇴합니다.)

 

 

 

 

일본군의 호남 진출

 

이순신 장군에게 막혀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군의

목표는 호남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남은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가 됩니다.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은 3대 전투

1차 진주성(해자와 남강으로 둘러싸인 요새)전투

웅치.이치 전투(권율장군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금산 전투

 

당시 전투 패턴은

500명 이하 적군과는 싸우면 이기고

그 이상은 지기 때문에 고지나 산성 전투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려던 일본군 판단 실수

 

실제 조선은 식량. 군수품이 많이 부족했던 상태

상업도시가 발달한 일본과 달리

농업 중심의 조선의 도시

 

조선에서 병참을 해결하려 했지만

결국 식량과 군수품 조달에 실패했고

심지어 많은 일본군이 굶어 죽는일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군이 패전 후 돌아와 성을 지을 때

비상식량까지 감안해 다다미를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조선을 위해 싸운 일본군이 있었다?

'항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했던 주군 휘하 가신과 병사들은

통일국가의 일체감 대신 봉건제 의식이 강해 그 반발로

조선에 명에 투항을 한 자들)

집단으로 투항하자 조선군은 위장술로 보고 이들을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당시 합리적인 면몰를 보였던 선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왜란 당시 선조의 무능함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사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합리적인 선택을 많이 합니다.

 

지속적으로 많은 수가 항왜하자

계속되는 불신에 항왜 장수들을 변방의 여진족 침입을 방어하게 합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이 너무나 전쟁을 잘한다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이들을 죽이게 됩니다.

 

 

 

 

 

임진왜란의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장악력이 좋아 내정보다는 전쟁에 어울리는 리더였습니다.

 

미천했던 신분에 외모도 볼품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집권내내 컴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임진왜란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일본을 완전히 통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 100년간 전국시대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 죽자

그의 막강한 라이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 판전승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이겼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의 장악력에 밀려 관동으로 빠졌고

그래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참전 안했습니다.

 

이후 장기전으로 치달은 임진왜란으로

군사적 기반을 잃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사합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추종세력과 맞붙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집권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을 평정한 그의 업적에 비해

동아시아 평정을 하겠다는 욕심은 과오였습니다.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실수였다는것이 지금의 평가입니다.

 

https://youtu.be/oNywf_xtmyc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