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전쟁사_제2차 세계대전-1

배움의 행복

세계사. 전쟁사_제2차 세계대전-1

notsun 2020. 3. 29. 21:04

역사상 최악의 전범 히틀러

 

제1차 세계대전 후 약 20년

다시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은?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각 국마다

강해지는 민족주의와 국내 산업.시장을 보호하게 됩니다.

 

영국은 각 식민지에서 연쇄적인 민족주의 봉기운동 발생

으로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922년 쿠데타로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합니다.

 

미국은 경제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는상황에서

통제할 여력도 없었던 세계 정세였습니다.

 

 

 

 

패전국 독일의 상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은 혼란기가 아니었고

당시 화폐. 세제. 철도 개혁 단행에 성공하고

이미 적극적인 전후 복구책을 실시해

독일 재건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경제부흥의 조건 3가지

국민의 목적의식, 문화수준, 기술

이 모두가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 최고의 혁신기술에 투자한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ex. G.M사 투자)

 

당시 독일의 목표. 정책은

' 빼앗긴 영토를 되찾자 '

' 승전국들의 경제적.군사적 간섭에서 벗어나자'

'힘을 키워야 한다.'

였습니다.

 

경제 성장을 이룬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까닭은?

 

경제가 망한 것을 히틀러가 성장시킨 것이 아니고

경제가 너무 빨리 성장하다보니

사회갈등(공산주의자 VS 자본가)이 발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공황'이 발생하자

블록경제(영국B, 프랑승B, 범미국B)가 생기면서

독일은 수출이 막혀버립니다.

 

결국 패전국이라는 핍박과 블록경제에 대한 분노는

독일의 강력한 민족주의를 대두하게 만듭니다.

 

히틀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력한 민족주의 토대 위에 독재체제를 구축합니다.

 

 

 

 

독일의 영토 확장 계획

 

이웃국가 침공 VS 빼앗긴 영토 회복 ?

 

독일에게 '비수'처럼 꽂힌 폴란드.체코 영토

독일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형상으로

전술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체코의 국경은 방어병력이 3배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빼앗긴 영토 회복은 명분이고,

1차 대전과 마찬가지 우크라이나를 욕심냅니다.

 

1938년 3월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빈에 무혈 입성

국민투표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시킵니다.

 

뮌헨회담(1938)에서 영.프.독.이 4국 수뇌부 회담에서

독일의 체코 주데텐란트(독일인 많이 사는 체코 영토)

합병 승인합니다.

체코 영토 분쟁에 대해 정작 체코 대표는 없었습니다.

(체코야 어떻게 되든 전쟁만 안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왜 폴란드를 침공했나?

 

폴란드 회랑으로 독일과 떨어진

동프로이센 지역을 되찾고자

폴란드를 침공해 2주만에 점령에 성공합니다.

 

 

 

 

독일군 기갑부대를 향해 폴란드 기병대가 돌진합니다

패전으로 승전국들에 의해 군사력을 제한되었기 때문에

가짜 전차로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폴란드 정부 망명후 폴란드군은 연합군으로 참전합니다.

강국들 사이에서 항상 잦은 침략에 저항해 왔었기 때문에

자유 폴란드군은 항상 희생이 큰 전투에 투입됩니다.

 

이 당시 영국.프랑스의 대응은 어떠했을까요?

이들은 설마 또 전쟁이 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독일도 재무장할 수 있을거라고 예측한 시기는

1946년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작

 

이후 독일은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잡합니다.

 

 

 

 

치밀하게 준비해온 전쟁의 막이 오르고

소련의 묵인하에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손쉽게 폴란드를 함락한 독일의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노선'을 뚤어야 할 전술을 궁리합니다.

여기에서 이 작전이 또 나옵니다.

 

바로 1차 세계대전 때 썼던 '슐리펜 계획'

"전술은 바뀌어도 전략은 불변이다."이라는 말이 있죠?

 

 

 

 

만슈타인과 구데리안 장군의 제안으로

대신 보병이 아닌 '기갑부대'로 진격합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은?

 

현대전의 한 획을 그은 작전으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프랑스는 독일 침공에 대비해

최정예 군단을 벨기에 전선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연합군은 B집단군을 독일군 주력으로 착각합니다.

그 틈을 타 주 공격군인 A집단군이

아르덴 숲을 돌파합니다.

 

 

 

 

이후 연합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양쪽으로 분리되고

연합군 주력이 독일군에 포위되자

영국군은 철수하고 맙니다.

 

마지노선, 오히려 독이 됐다?

 

아르덴 숲을 통과한 A 집단군이 마지노선을

뒤에서 포위하고견제 공격하던 C집단군은

마지노선을 정면에서

슈투카라는 급강하폭격기의 활약으로 돌파.공격합니다.

 

 

 

 

마지노선은 고정 진지였기 때문에

독일군에 포위된채 공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독안에 든 쥐 신세였던거죠

 

마지노선이 무너지자 파리는 무방비도시로

전락. 함락되고 프랑스에 항복을 받습니다.

 

 

 

 

히틀러의 결정적 실수

 

영국으로 철수하기 위해 덩케르크 항구에 집결한 연합군

그 때 히틀러가 기갑부대 진격을 중시시킵니다.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설1)예상보다 빨랐던 기갑부대 진격 속도로

보급 부대와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전열을 정리하려는 의도

 

가설2) 막강한 프랑스군의 반격을 염두에 두었거나

 

가설3) 영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영국군을 살려 보낸 노림수 가 있습니다.

 

히틀러는 1차대전 참전 경험으로 영국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상시에 "영국과 가톨릭은 세계평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전력상으로도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에

영국의 항복 또는 참전 포기를 내심 희망했던거지요

 

 

 

 

독일의 수송 능력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서부.동부 전선을 막론하고

군수품 보급으로 양면전쟁이 가능하도록 했었습니다.

 

기계화 사단으로 중 무장했다고

대중에게 각인된 <무적 독일 기갑사단>

전격전의 환상 뒤에는

실제 독일 기계화 주력부대는 20% 수준이었고

2차 대전에 보급수송을 마차까지 동원했습니다.

 

 

 

 

첫 번재 빅 매치 독일 vs 영국 무기 비교

 

독일군 무기

 

'88mm포'

롬멜이 대전차포로 사용하면서 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 9문에 영국전차

90여대가 격파당했습니다.

 

 

 

'독일전차'

빈약한 장갑의 1,2호 전차가 대부분이었지만

모든 전차에 무전기 설치로 병과 간

합동작전. 집단 운용 전술이 가능했다는 것이

큰 강점이었습니다.

이후 긴 포신의 75mm 포를 장착한 4호 전차가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이 됩니다.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로 급강하시 풍압식

사이렌이 울려 공포 효과까지 더 했습니다.

 

 

 

'메서슈미트'

독일 공군의 주력기로서

영국 스피트파이어의 영원한 라이벌이었습니다.

 

 

 

U-보트

순항함 등 해군력이 부족했던 독일은

잠수함이라는 비대칭 전력으로 맞섰습니다.

 

 

 

영국군 무기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

영국 공군의 자부심이었고

독일 메서슈미트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레이더'

전파의 특성을 이용한 레이더를 영국이 최초 개발합니다.

레이더로 야간 공습에 혼쭐난 독일도 레이더를 개발하자

영국은 레이더 교란용 채프(알루미늄 조각)를 개발합니다.

 

 

 

독일, 영국과 협상 시도

 

프랑스 항복 후 히틀러는 영국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를 처칠이 거부합니다.

 

당시 독일군 수뇌부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연합군은

탱크. 중화기 등을 모두 프랑스에 두고

맨몸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영국 침공을 강행하자고 까지 주장합니다.

 

이런 급박한 전황을 반영하듯 형태.구조가 단순한

스텐 기관단총을

단기강 약 400만정 대량생산합니다.

 

 

 

 

또한 독일 공수부대를 두려워 한 나머지

시민들이 때려잡는(?) 방안과

집결을 못하게 하기 위해 이정표를 바꿔놓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영국 침공 작전

 

괴링 독일 공군 사령관의 1차 작전은

영국군의 기지. 군수시설 등 광범위한 파괴작전으로

영국공군에 각개 격파됩니다.

 

 

 

 

이에 영국 공군 섬멸을 목표로하는

2차 작전으로 바꿉니다.

이때가 영국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도버해협 상공에서 소모전 양상으로 제공권

싸움이 계속 되고 벼랑 끝에 몰린 영국이

베를린 야간공습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의 한수였습니다.

히틀러가 런던 공습으로 작전을 선회하자

영국 공군은 재건할 시간을 벌게 된 것이죠

 

또한 독일 공군이 소련전선으로 대거 이동하게 됨으로써

영국에 숨통이 트인 것입니다.

 

도시공습이 본격화된 배경

 

1차대전 이후로 민주주의가 발달합니다.

그러면서 전쟁을 종식 기키려면

결국 민중. 민심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전쟁을 반대하게 할까

고민해서 앙케트 조사를 하게되는데

집이 없을 때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쟁이 나서 집을 없애버리면

국민들이 염증이 생겨 전쟁을 반대할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전략목표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더 도시 공습으로

민간인들의 전투의지가 더 솟아났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이 더 참혹한 것은

민간인을 일종의 예비 병력으로 간주해

살육전이 등장했습니다.

결국 민간인 희생을 초래하는

잔인한 전쟁의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이탈리아

 

2차대전 전범국을 추축국으로 부른는 이유

추축국은 독.이.일을 중심으로한 국제 동맹으로

 

이들이 국제관계에서 중심축(추축)이 될 거라는

무솔리니의 연설에서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파시즘의 창시는 원래 무솔리니였으며

이탈리아는 당장 800만의 보병 참전이

가능하다고 장답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전쟁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로마 이후 이탈리아 군은 항상 신문기사

소재가 될 정도였습니다.

 

로마군이 하루에 40km를 진격했지만

2차 대전당시 이탈리아 군대는

하루 25km를 넘지 못했습니다.

 

식사를 항상 중요시 했기 때문에

영국군이 새벽 빵굽는 냄새를 알고 이탈리아 군을

찾아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발칸반도를 침공하고 3주만에 후퇴한 이탈리아는

결국 히틀러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대신 독일군은 약 1개월만에 발칸반도를

점령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이탈리아군 (20만)과 영국군(6만)이

전투를 벌였을 때에도 참패를 당합니다.

 

사막의 여우 롬멜

 

이탈리아 지원을 위해 북아프리카 전선에

롬멜이 파견됩니다.

단지 생색내기 정도였으나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주역이 됩니다.

 

 

 

 

'가마솥 전투'

전차 성능.규모에 앞선 영국군의 방어진으로 들어가

차례대로 영국 기갑부대를 격파한 전투입니다.

 

하나씩 불러들여 싸움을 벌리고

영국군이 차례대로 격파됩니다.

 

그럼 왜 영국군은 합동 공격을 하지 않았을가요?

 

영국사람의 특기가 다른 군사 직종간 협력이

약한 전통이 있어 이를 이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돌프 히틀러

 

독일과 인접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사생아에 성적부진아 였으며

폭력적인 아버지 밑어서

친구도 없이, 미술을 한다고 어린시절 고생이 많았습니다.

 

 

 

 

히틀러 그림의 특징은

수채화 풍에 인물이 없거나 불안정하고

 뭔가를 감추듯이 그렸다고 합니다.

화가로 성공하지 못한억눌린 내면의 감정이

그림에 표출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가 보통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눈은 높은 곳에 두는데

그렇다고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분명하지 않고,

그러다가 누가 부추기면 쉽게 넘어오기 싶다'

는 것입니다.

 

 

 

 

빈에서 보낸 청년시절에도 이미

반유대주의자가 되어 있었고

왜곡된 인종주의, 민족주의 성향이

시작되었습니다.

 

히틀러가 독재권력을 쥐게 된 배경

 

바이마르 공화국 때 이미 경제성장을 이룬 독일

경제성장과 패전국이라는 혼란의 시기

히틀러는 독일인의 '국민적 한'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때 나온 슬로건인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 입니다.

노골적으로 독재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지요

 

이로써 총통의 권한을 부여하는 1934년 국민투표에서

약 88%의 지지율로 히틀러가 신임을 얻습니다.

다른 독재자와 다르게 합법적 수단으로

독재권력을 손에 쥔 것입니다.

 

그래서 2차대전 후 독일인들이

스스로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자기들이 직접 뽑은 총통이

전범이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

 

유대인 문제는 단지 히틀러나 독일의 문제가 아니고

유럽 전반에 걸쳐 만연된 풍조였습니다.

 

사회가 문제가 생기면 마녀사냥이 필요했고

유대인이 희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다른 국가에서는 유대인을 공격해

재산을 뺏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일종의 '중세식 부의 재 분배'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했던

1차 세계대전의 패인이

내부의 적인 '유태인'때문이다고 히틀러가 몰아갑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보다 '집시'들의 피해도 컸습니다.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집시, 동성애자, 부랑자,

지적장애아 등을 처형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망상인

'아리아인의 천년제국'에 이들을

불필요한 존재(불량 유전자)

로 생각한 것입니다.

 

히틀러의 최후

 

최후의 순간까지 망상해 시달려

죽는 순간까지 지하 벙커에서 지도를 펼쳐보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많은 부하들이 즉결처형되거나

도망가게되고

 

1945년 4월

에바브라운과 결혼식 후 동반자살합니다.

 

 

 

2차 세계대전 2부 아래 눌러주세요~

 

https://notsunmoon.tistory.com/184

 

제2차 세계대전-2

우리에게도 많은 상처와 피해를 남겼던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 일본제국 일본은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인구, 영토가 절대 독일 프랑스의 밀리지 않습니다. 항상 세계 상위권에 국가였고 메이지유신(1868년)..

notsunmoon.tistory.com

 

 

관련 내용 및 사진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youtu.be/Dl_9XOi2YKU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