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릇된 야망
으로 조선을 침략
일본 수군의 무기와 함선
섬나라 일본은 의외로 수군보다 오히려 육군이 강했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휘하 수군장 대다수는 해적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노략질을 하고 빨리 도망가야 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도 쾌속정이 발달했습니다.
안택선은 지휘선이었기 때문에 집중 공격을 받았고
선체 상부가 노출되어 포탄 공격으로 반파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본 수군의 주력선 관선
내구성이 약해서 대포 1대로 무장했습니다.
그나마 줄에 매달아 쏘는 대포는 명중률이 매우 낮았습니다.
조선수군의 무기와 함선
을묘왜변(1555)
일본 해적이 전남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
이후 조선 수군의 무기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킵니다.
맹선은 해적 소탕용으로 전력 약화 요인이었습니다.
판옥선은 왜구의 조총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적의 지휘선 공격을 맡았던 전형적인 돌격선으로
노 젓는 곳, 포 발사대를 위아래층으로 구분 설계해
사방에서 포 발사가 가능했습니다.
거북선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졌고
이후 개량. 보완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 수군의 원동력
14세기 말부터 약탈.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을
막기 위해 군사 전술을 강구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함선. 무기. 전술이 개발된 것입니다.
조선수군(이순신 장군)의 첫 해전 옥포해전
당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였고
경상우수영에 속했던 옥포 해역
담당 해역도 있지만 물길. 조류에 맞는 전술훈련 부족한 경남 해역보다
확실하게 준비한 바다에서 싸우고자 이순신 장군은 신중했습니다.
이를 선조가 나중에 트집 잡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이 싸움을 회피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군은 반드시 전라도 해역으로 와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리한 곳에서 싸우겠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결국 옥포해전에서 승리합니다.
일본군에게 이순신 장군은 사신(死神) 같은 존재였습니다.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한산도 대첩
해상전 전투 방식은
백병전, 충격 전, 사격 전으로 나뉩니다.
이중 충격 전은 충돌 후 백병전으로 이어집니다.
백병전은 일본군이 우세했기 때문에
학익 진법이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해 해전에서 격퇴시킵니다.
한마디로 물길까지 완벽히 파악한 맞춤형 전술이었습니다.
전술의 기본 수칙인 적을 분산시켜 격파한 것입니다.
2차 침략인 정유재란에 나선 일본 수군의 계략은?
일본 수군은 보급로 확보를 위한
제해권 장악이 목표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의식해 거짓 정보를 남발하지만
여기에 속지 않습니다.
문관이 합참의 역할을 했던 당시 조정은
거짓 정보를 믿고 이순신을 오해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분법에 빠져
육군은 일본 vs 조선은 수군이라는 등식을 만듭니다.
조정의 이런 단순 논리에
2차 침략해도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막으면 이긴다라고 안심해 버립니다.
하지만 부산 해역은 파도가 거세서
편평한 바닥의 판옥선에는 불리합니다.
그래서 유리한 전라도 해역에서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격퇴하려 했던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선조는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좌천시킵니다.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해임되고 한양으로 압송됩니다.
임진왜란 해상전의 치명적 오점 '칠천량 해전'
일본의 교란. 기습작전에 휘말려
169척의 함선과 수군 병사들을 단 한순간에 잃게 됩니다.
임진왜란에서 최대의 참패였습니다.
최악의 해전 후 살아남은 수군 병사 120여 명과
단 12척의 배
이후 남원성이 함락되고 최대의 학살극이 벌어집니다.
이에 선조는 다시 이순신 장군을 기용합니다.
기적의 승리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12척 vs 330척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기적의 승리였습니다.
울돌목은 고려 때부터 유명했던 해전 접전지역이었습니다.
물길을 알지 못하면 배 운항이 어려웠습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의 비밀 무기로
대형 함 섬 안택선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울돌목은 폭이 좁아 대형선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본 수군도 역사적 교훈을 주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욕심이 결국 무리한 공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참혹한 희생을 낳은 패장들의 오판이
'몇 명이 죽든 이것만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한 것입니다.'
수륙병진으로 한양을 점령하려던 일본군을 저지합니다.
전염병
1차 대전 때보다 전사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듯이
우리 조선군도 전염병으로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군은 특히 좁은 배의 밀집된 공간. 높은 습도로
가장 최약의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부족한 군량으로 면역력 결핍도 악순환의 고리였습니다.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598. 8)
일본군이 철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그 일본군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노량해전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징벌적 차원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정식 강화 협정을 맺고 나간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쳐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도망치려는 일본 vs 막으려는 조. 명 연합군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필사적 전투였고
그래서 노량해전이 가장 격렬했던 전투였습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도 전사합니다.
종전 후 3국의 상황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신분제 동요, 상업 발달 등등
조선 후기 벌어지는 대부분의 현상은 임진왜란과 직결됩니다.
명은 만주족에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 청나라가 건국됩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가 몰락하고
1603년 에도(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됩니다.
이후 개방정책에서 쇄국정책으로 바뀌게 되고
이것은 근대 일본을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불멸의 무패 신화
난중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남겨지고
전투뿐만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군인이었고
항상 최선두에 서서 싸웠습니다.
(해전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
백의종군은 실상과 다릅니다.
직위는 없으나 고문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선조의 메시지
"전쟁이 끝났다고 좋아만 하고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비판이 두려워 실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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