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전쟁사_제2차 세계대전 -3(태평양전선2)

배움의 행복

세계사. 전쟁사_제2차 세계대전 -3(태평양전선2)

notsun 2020. 4. 5. 15:32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의 전략은?

 

미 태평양함대가 전멸될 때까지 태평양을 지키는 것이

일본의 전략이었습니다.

 

1943년부터 미국이 본격적으로

군수 산업을 일의 킵니다.

 

당시 미국의 공업 능력 수준은

9일에 1척 꼴로 항공모함이 만들 정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이 총 26척이었지만

미국은 대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총 144 척을 만듭니다.

 

또한 우수한 파일럿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전까지  모든 면에서 앞서가던 일본 군사력이

이제는 양과 질에서 전세가 뒤집힙니다.

 

미국의 대응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은 육군 사령관과 해군 사령관을

동경 156도를 기준으로 나눕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미 해군 사령관은  각자

공군. 지상군. 함대 지휘권을 모두 지녔기 때문입니다.

 

일본 군도 서로 협력이 안 된 것은 마찬가지여서

 육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참패한 것을

6개월 이후에 알게 됩니다.

 

 

 

 

니미츠 제독이 인정한 맥아더의 창의적인 작전은?

 

맥아더는 사자의 물소 작전 대신

'개구리 뛰기 작전'을 제안합니다.

 

강한 곳은 우회, 약한 곳부터 점령하면

적은 병력으로 신속한 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은 준비된 작전에는 강하기 때문에

무조건 신속하게 치고 빠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니미츠는 이에 해군의 자존심보다는

작전의 가치를 간파하고 따릅니다.

 

 

 

 

맥아더 vs 니미츠

 

맥아더

 

명문가 출신 육사 수석졸업의 엘리트

 미 육군 참모총장도 최연소였습니다.

 

할아버지도 남북전쟁의 참전군인이고

아버지는 16살 때 남북전쟁장 참여 18살에

최고 무공훈장까지 받았습니다.

 

 

 

 

맥아더의 존경스러운 점

 

첫째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둘째는 임무 완수에 매진했던 맥아더의 리더십으로

1 차 세계 대전 때도 부하보다 먼저 뛰어나갔고

2차 대전 때 유명 아니라 가 상륙작전 때에도 작전 성공과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니미츠 제독

 

텍사스 출신으로 서부 한 마을

여관집 아들로 태어납니다.

 

사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육사는 T.O가 없어서 못 가고

당시 해사는 한 자리가 남아 추천으로 입학합니다.

 

 특징은 일단 휘하 장군 들한테  일임합니다.

큰 틀만 짜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방식입니다.

 

또한 적재적소에 맞는 인물을 배치를 잘합니다.

덕과 인화를 중시하는 '형님 리더십'이었습니다.

 

초반 진주만 공습으로 타격받은 미 태평양 함대를

효율적으로 이끈 사령관으로

 개성 강한 육군과 해군의 협력을 이끌어내

장군들의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맥아더와 니미츠에 대한 세간의 평가

 

공통점

1) 부하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리더십

2) 정확한 판단

3)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

 

미군의 무기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군은

신무기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1) 헬 켓(지옥에서 온 고양이)

미 해군의 주력 함상전투기

일본 분 제로 전투기 출력의 거의 2배

일본군은  '재앙'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2) F4u 콜스 에어(죽음의 휘파람)

'수퇘지 '라는 애칭으로

급강하 시 독특한 바람 소리로 죽음의 휘파람이라 불림

 

 

 

3) B-29 폭격기

미 육군 항공대의 전략폭격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도 투하했습니다.

 

 

 

 

4) 에식스급 항공모함

미국의 막강한 공업 능력을 바탕으로 20세기의 건조된 대형 항공모함

넓어진 비행갑판, 항공 운영 엘리베이터 배치

외부 공격 방어력

 

 

 

 

 

 

 

개구리 작전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인 타라와 전투

니미츠 제독 휘하에서 한 전투입니다.

이곳을 점령해야 이제 일본군 점령 적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미군은 개구리 작전을 통해

점령하는 섬마다 무조건 비행장을 만들고

해군 공군 전투기들이 발전해서 일본 보급로를 다 차단합니다.

 

일본군도 타라와의 중요성을 알고 완전히 요새화

1,400명 가까운 조선인들이 가서 공사를 했고

시바자키 소장은 난공불락 요새로 호언장담 합니다.

 

 

 

 

수륙양용 차량이 등장한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능이 좋지 않았고

물 때를 잘 맞춘 데다가 미군의 예상과 달리

너무 수심이 약해서

해안가 멀리서 병사들을 내 보내 피해가 컸습니다.

 

 

 

 

 미군 해병대 정말 큰 부피의 예

거의 뭐 3천3백 명 가까이 사상당합니다.

 

 타라와 전투는 그 이후에

수많은 상륙작전의 교범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엄청난 공격과 물량에 밀려 난

일본군은 자살 공격으로 맞았고

일본군의 점멸로 끝이 났습니다.

 

필리핀 탈환(레이테 만 전투)

필리핀전의 평가는

일본 해군의 등뼈를 부러뜨린 해전입니다.

 

바지가 젖어 가면서 상륙하는 맥아더

사실 상륙정에서 수심이 얕으니 못 같다고

내리라고 했다는 뒷 이야기가...

 

하지만 젖은 바지와 분노에 찬 표정은

오히려 좋은 효과를 얻고

인천 상륙작전에서도 또 연출합니다.

 

 

 

 

필리핀의 상륙을 해서 미군과 일본 동일한 조건에

전쟁을 벌입니다.

미군 40만 vs 일본군 40만

 

39 만에의 일본군 전사합니다.

미군은 만 명 전사. 결국 필리핀을 되찾습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

 

유명한 이사진은 이오지마에서 연출된 것이라고 합니다.

진짜 깃발이 볼품이 없어

사진기자와 다시 찍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요충지는 아니었지만

 

중간 기착지로  이오지마 비행장이 필요했습니다.

 

 

 

 

폭격기들이 고장 나거나,피격됐을 때

중간에 착륙 활주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본의 전술이 바뀝니다.

당시 사령관인 구리바야시는

옥쇄. 자살 공격 금지와

이오지마의 요새화

사거리에 따른 방어망 구축

여기서 일본군은 점멸할 것을 알았고

대신 미군에 최대한 피해를 주는 지연전이 목표였습니다.

 

 

 

그나마 일본이 제대로 된 전투로서

태평한 전쟁의 후반에 일본군보다 미군의 피해가 더 큰 유일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한 달이 넘는 접전 끝에

미군은 일본 본토로 가는 교두보 확보하게 된다.

 

 

 

 

 

 

전쟁 후반 등장한 일본 자살 특공대

 

일본 우익이 말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서 장렬하게 희생한 전술이었을까요?

 

 

 

 

'생존이 있어야 승리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카미카제 가 총 1,200여 대 조종사가 다 죽습니다.

아예 조종사 탈출을 막기 위해 조정석 캐노피까지

용접해 버립니다.

 

그런데도 정말 많은 가미카제 조종사들이 도망가는 경우

호위하기 위해서 따라붙었던 도망가는 전투기를

격추시킵니다.

 

사무라이 정신으로 포장해

만행을 미화시킨 일본의 수뇌부였습니다.

 

 

 

 

아시아 전선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는

일본과 영국군이 맞붙습니다.

 

임팔 작전은

인도 동부 영국군의 군사적 거점기지인데

 

1943년에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이제 미국과 영국이 버마를 탈환을 결정합니다.

 

 

 

 

미국이 장개석을 지원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지역이였고,

영국은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접경 지대 인도 동부에 있는 임팔에 병력을 집결하자

 

일본군은 산악지대와 정글을 뚫고 약 100km 이상

진격하는 무모한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군은 보급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참모들은 반대를 하지만 강행합니다.

 

 

 

 

 임팔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주 커다란 친드윈 강을

건너야 하는데 보급품 실은 소와 말. 노새 90%가

강에 떠내려 가지만 전진합니다.

 

총 6만 5천 병력 중 약 5만 명이 싸워보지 못하고

굶주림 속에 사망하고

살아 돌아온 전력은 전체 20% 뿐이었습니다.

 

종전 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지만 그의 무능 때문에

불기소 석방되고 군사학교 교장까지 합니다.

 

 

도쿄 대공습

 

한편 1945년에 접어들자 미국은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도쿄 대공습을 준비한다

3월 10일 소위 탄을 투하하여 도쿄는 불바다가 됐고

사상자만 10만 명 이상 이제민 까지 속출했다.

 

 

 

도쿄의 강이 끓어오를 정도였으며

이재민이 1,300만 이 생깁니다.

 

많은 분들이 왜 민간까지도 무차별 희생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대다수 군수산업이

가내수공업 형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때는 도시 공습이 대단히

중요한 전략이기 했습니다.

 

도시를 공습을 하는 이유가 국민이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을 끝내려는 것인데

일본 국민들은 반대로 같이 죽자 였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미군이 일본에 상륙했다가는 1억 명의

옥새 부대를 만나게 되고 미군 희생도 어마어마하고

민간인 피해도 어마어마할 거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제 미국이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을 계획하지 몰락 작전이라고

해서 계산을 해보니까 미군 병사 상자만 100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합니다.

태평양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미국의 꺼내는 최후의 카드는

원자폭탄이었습니다.

 

첫 번째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고 나서 일왕이 보고를

요구 하지만 별 피해 없다고 보고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항복이 없자

그래서 3일 후 2차 폭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자폭탄 및 도쿄 대공습을 초래한 주범은

일본 지휘부 '대본영'이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2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마칩니다.

 

 

 윤봉길 의사에 의해 한쪽 다리를 잃은

대표자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조인식에 참석합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의 관점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는

우리와 같은 국립묘지가 아니라 신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신사에는

 

러일전쟁과  가미가제

그 인간 어뢰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반성 없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침략 전쟁과 전쟁 문제와 제국주의적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4탄은 아래를 방문해주세요~

 

https://notsunmoon.tistory.com/191

 

제2차 세계대전-4(유럽.북아프리카 전선)

연합국의 반격 작전은? 러시아 전선에서 소련군 희생자가 벌써 700만이 발생했고 이에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에 항의를 했습니다. 왜 우리만 독일과 싸워야 하냐고? 스탈린 유럽의 제 2의 전선을 구축을 요구합니다..

notsunmoon.tistory.com

 

이상의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s://youtu.be/Iq_ny65w7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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