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기를 좁게 만드는 것은
'특정 가치'에 빠지기 때문이다.
왜 특정 가치에 빠질까?
지혜가 떨어져 이 세계를
구분해서 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구분되어 있지 않다.
구분은 네 자신이 하고 있다.
無의 경지
옛 사람의 지혜는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있었다.
그 최고의 경지는 無의 경지이다.
사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손이나 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궤적'만 있는 것이다.
이 것이 무의 경지이다.
감각이 없는 상태이다.
흔적만 있는 상태이다.
이것이 최고의 경지이다.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이 있으나 구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공과 손이 다른것이 아니라
이 둘이 모두 氣로 되어 있다.
그 아래는
공과 손이 따로 있지만
이 둘 중 누가 옳은지에 대한
시비를 따르지는 않는다.
시비가 나타나면 道가 파괴되는
원인이 된다.
시비는 구분을 하는 것이고,
구분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기준을 가진 것은 작은 마음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가 파괴되면 편애가 이루어 진다.
이 단계에서 괘적을 보지 않는다.
지적 승화를 계속해서 이뤄내면
공과 손의 시비를 넘어
이 두가지가 만들어진 궤적을
볼 수 있고 생존의 질과 양이 증가된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고 효율의 추상가치이다.
따라서 지적이해는
세계와 관계하는 효율적인 무기를 갖는 것이다.
건너가기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되지 않은 단계
그리고 그 이전의 단계가 있다."
사물의 기원을 쫓으면 한정이 없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있다, 없다의 대립이 있고
이 대립은 상대적이어서
정하기 힘들다.
장자는 이런 생각을 통해
최상위 단계의 아주 근본적인 실체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런 단계를 숙고하면서 인간의
지적 이해력을 상승.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시선을 상승시킨다는 것이 중요하지
상승해서 그 끝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진 않는다.
따라서 지혜는
건너가서 어디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건너가는 과정이고 진리이다.
지속적으로 건너가기를 통해서
인간은 궁극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 세계는 '건너가기'에만 있지
건너가서 도달하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건너가기가 나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내 일상에서는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이런 자각이 자기 영혼의 능력을 키우고
승화.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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