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를 향한 집념 페라리 2

배움의 행복

스피드를 향한 집념 페라리 2

notsun 2020. 5. 5. 09:32

페라리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입니다.

 

알파로메오사는 유럽그랑프리에 나가기 위해

시합 하루 전 경기장에 도착했고

연습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새로 선보인 자동차 P1의 결함으로 그의 동료

세바치가 죽게되자 엔조는 절망하게 됩니다.

 

 

야노, 바치, 페라리는 다시 P1을 디자인합니다.

사실 엔조는 디자이너도, 엔지니어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달 만에 P1을 개조해

P2를 선보입니다.

 

 

P2는 경주에서 시속 200KM의 속도를 내고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합니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피아트가문을 물리치고

경주마다 줄줄이 우승합니다.

 

 

이제 비로서 시작됩니다.

페라리는 제정적 후원자를 구하는데도 성공하고

알파로메오사에 자동차 경주부문을

자기에게 양도할 것을 제안한다.

 

 

1929년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공장을 엽니다.

스쿠데리아는 마굿간이라는 뜻입니다.

 

 

알파로메오의 차는 엔조 페라리의 규격에 맞추어

이곳에서 재생산됩니다.

 

하지만 사업과는 반대로 그의 가정생활은

엉망이었지만, 결혼 10년만에

디노늘 낳았습니다.

 

하지만 디노는 지병을 가지고 있어

페라리가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합니다.

 

 

1939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페라리는 살아남기 위해 파시스트에게

협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자

이탈리아의 경제가 수렁에 빠집니다.

 

자동차 경주는 무기한 연기되고

살아남기 위해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전쟁물품 생산 라인으로 개조합니다.

 

 

거기서 무엇을 만들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이후 정부는 연합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공장을

옮기라고 권고하고 공장을 옮기는데 그 와중에

'리나 라르디'를 만나게 됩니다.

 

 

리나는 페라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침착하고 조용한 그녀는 그에에

평화와 안식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46세의 페라리는 그녀와 사귀게되고

얼마 후 아들을 가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거액의 달러가 이탈리아에

유입되면서 경제가 되살아나자

다시 자동차 경기가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에 그는 새차를 개발하고

1947년 12기통 배기량 1,500CC의

차 '125스포트'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어마어마한 엔진으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작은 자동차 경주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연료 펌프가 고장나면서

첫 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그는 '성공적 실패'라고 자평하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125는 페라리 왕국 탄생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후 유럽의 엔지니어와 레이서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주용 차를 개발합니다.

 

페라리 자동차는 레이싱에서 승리를 거듭하고

승승장구 합니다.

 

 

국제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1년에 백만달러

정도가 필요했기 때문에 현금 보유를 늘려가기

시작합니다.

 

페라리의 레이서였던 루이지 카네티로부터

미국의 페라리 승용차 판매권을 요구받게 됩니다.

 

 

당시 페라리는 승용차에 관심이 없었고

자금조달을 위해 승락합니다.

 

한편 페라리는 양쪽의 생활가정을 둔 이중생활자로

십년 이상 계속되었지만 디노가 사망했고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해

차의 이름에 '디노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때 첫 부인 로라가 그의 외도를 알게되었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습니다.

 

이후 페라리의 경주용 자동차 분야에 문제가 생기는데

이따라 트랙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합니다.

 

 

이로인해 페라리는 과실치사협의로 기소되고

자칫하면 사업을 접어야 할 수 있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1957년 대망의 '밀레 밀리아'

천마일 오픈 로드 레이스로도

명성이 자자한 경주에 참가합니다.

 

페라리는 슈퍼스타팀을 구성해

5팀이 참가하고 그 중 한 팀이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균형을 잃고 관객속으로 돌진했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여기서 페라리의 죄목은 스피드를 감당 목할

타이어를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페라리는 경제적,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4년 동안 끌던 재판은 결국 무죄판결을

받고서야 끝나지만

1961년 그랑프리대회에서 다시 사고가 나고

언론이 아우성을 쳤고 큰 돈이 지출됩니다.

당시 페라리는 63세였습니다.

 

 

과연 페라리는 이 난관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요?

 

다음 포스팅을 기대해 주세요~

 

위의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s://youtu.be/ovkXI4l68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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