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전쟁사_십자군 전쟁-2<예루살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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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전쟁사_십자군 전쟁-2<예루살렘 점령>

notsun 2020. 5. 3. 22:55

이번 2부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의 통치는?

 

십자군의 원정은 비잔티움이 요구에 의해

시작되었지 때문에

 십자군에 충성 서약 요구하지만

 

십자군은 이미 비잔티움과 협정이 파기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마구잡이 정복과 국가를 세웁니다.

(에데사 백장령,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국)

 

 

그럼 원정을 갔던 세 명 중

누가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을까요?

 

 

레몽

셋 중 가장 권이가 높았으며

전 재산을 팔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고드푸르아

동생 보두앵과 같이 참여했으며

예루살렘도 고드푸르아가 정복했습니다.

 

타란토 공작. 보에몽

제일 인생이 파란만장한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노리는 위험 인물 1순위

이기도 했으며, 비잔티움 안나 콤네네 공주가

극찬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 명 중 '고드푸르아'가 왕이 되지만

일찍 죽게되고 동생인 보두앵이

왕이 됩니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변화

 

예루살렘에는 이슬람인,

십자군, 성지순례 유럽인까지 다양한

민족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십자군 기사들이 귀향하고

교황, 유럽인들에게 예루살렘 이주를 권합니다.

 

보두앵이 이슬람과 유럽인의 화합정책을 펴기는 합니다.

 

 다민족 다종교 국가가 됨에 따라 서로 결혼도 하고

이슬람과 십자군은 잦은 분쟁 속에서 서로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하는 유럽인이 급증하고

십자군 4대 왕국은 점차 부유해 집니다.

 

공격받는 유럽인 성지 순례자

 

예루살렘 점령 당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슬람이 십자군에 갖는

적대감은 당연했습니다.

 

또한 십자군과 이슬람이 적응하며 잘 살아가고 있었지만

국가 수비를 위해 유럽에서 파병해 오는 십자군은

이슬람을 대한 적대감이 기본적으로 커서

문제를 이르켰습니다.

 

또한 일부에서는 이슬람 핍박정책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의 알 아크사 사원이 마구간으로 사용되고,

마호메트가 승천한 자리에 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이에 십자군에 대한 분노가 극도에 달하게 되고

이슬람교도는 성지 순례길에 오른 유럽인을

게릴라식으로 공격합니다.

 

이런 이슬람의 공격에 십자군은 병력이 상당히

모자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정착하는 유럽인들이 드물었던 상황

실제 이주를 하더라도 정착할 땅이 많은 것이 아니었고,

 

정복 이후 십자군은 대부분 귀향을 한 상태여서

병력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군은 주요 거점에 성을 쌓아

방어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훗날 유럽 축성술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십자군 왕국을 지켜낸 무기

 

십자군 중기병

말에게도 갑옷(마갑)을 입혔고

랜스(긴 창)를 사용해

탱크처럼 돌진해 충격으로 적을 격파했습니다.

 

 

이슬람

중기병 + 궁기병 보유

기동력이 떨어지는 십자군을 괴롭혔습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

십자군 왕국 방어서 네트워크의 일부

두개의 동심원 원형 성벽이 방어 기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위협적인

성이었습니다.

 

 

공성무기

화약무기 이전이어서 성공략이 쉽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콰스 알라랍,

 

 

발리스타

 

 

출처: 네이버 백과

 

전통적 투석기 '만지니크'

 

 

카부쉬

헬레폴리스

높이 30, 각 층에 투석기 배치

꼭대기층 궁수 배치

 

 

 

 

 

성지 순례자의 보디가드가 등장

 

요한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이 등장합니다.

요한기사단은 중병환자를 돌보는 병원 기사단으로

의료활동을 벌인 특수 기사단입니다.

 

탬플기사단

 

십자군왕국 지킬 상비군이 부족하자

국적 초원 템플 기사단이 탄생합니다.

 

이 기사단에는 기사 뿐만 아니라 사제도 있었는데

이유는 충만한 신앙심과 잉여인력이었고 단체생활(수도원)

에 익숙해 적응력과 단결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충만한 신앙심과 금욕적인 생활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고 돈의 부족으로

템플기사단이 금융업과

성지순례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나중에는 교황과 프랑스 왕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을 찍히게 되고

 

또한 부유한 군사조직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이 기사단이 자국으로 복귀했을 때에는

왕에게 위협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어

전원 처형됩니다.

 

원정 후 상업, 무역 중심지가 된 예루살렘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무역을 도맡아 하게 되고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십자군왕국을 상대로 운수업과 금융업까지

장악함으로써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가 이 시대부터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비잔티움이 방관했던 이유는

1. 세력 부족과

2. 과한 부유함

 

요한 기사단에 비해 극단적 성향으로

난폭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차 십자군 원정의 원인은?

 

당시 이슬람은 통합 리더 없이

자체 세력 군주들이 지배하는 '부족제'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이집트 지역의 시아파와

사라센 지역의 수니파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었는데

 

이슬람세계에 걸출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마드 앗딘 장기'라는 사람으로

수니파 세력을 통합하고

 

1144년 무려 전투에 능한 기병 3만 대군을 이끌고

십자군의 에데사 탈환에 성공합니다.

 

탈환 당시에 공성전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땅굴을 파서 공격합니다.

 

당시 십자군은 예루살렘 정복 후 약 50년간 평화롭게

지내왔기 때문에 대군이 공격하자 십자군 기사단도

당황했습니다.

 

이슬람의 에데사 점령 후 복수극이 벌어지고,

이 에데사의 점령이 전 이슬람 세계를 동요시킵니다.

 

지하드

<신앙이나 원리를 위하여 벌이튼 투쟁>

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슬람의 통합이

시작되기 됩니다.

 

이에 2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됩니다.

 

다음 십자군전쟁 -3으로 이어집니다.

아래를 눌러주세요

 

www.notsunmoon.tistory.com/213

 

 

이상의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s://youtu.be/vLgdHr3Qx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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