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전쟁사_십자군 전쟁-1

배움의 행복

세계사. 전쟁사_십자군 전쟁-1

notsun 2020. 4. 26. 21:21

200여년간의 세계 최장의 전쟁

 

원정규모는 약 6만명

기사의 가족과 노예 그리고 그 노예의 가족까지

대규모 이동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교회도 세우기도 하며

성지순례를 활성화 시킵니다.

 

헬레나

 

이전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친선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맘루크'로 셀주크 튀르크가 정권을 차지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지순례를 차단합니다.

그리고 비잔티움 세력을 소아시아 밖으로 몰아내면서

 

 

비잔티움을 도울 용병 자원자 모집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 모집 계획이 교황을 거치면서

성지 탈환전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재 당시 유럽의 상황은

중앙집권 왕권이 부재했고

영주중심 봉건제였기 때문에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국왕들 간의 세력 각축이 벌어질려는 시기였고

교황은 통일된 행정체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카노사의 굴욕'

(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과의 싸움에서

교황이 승리한 사건)등을 계기로

 

교황의 권력을 되찾으려 합니다.

 

두산백과

 

따라서 종교적 측면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큰

전쟁이었습니다.

 

 

십자군 파병에 대해 유럽이 열광하는 이유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선동적인 연설 특히

이슬람을 극도로 비난했는데

 

특히 기사계급의 불안한 심리

(같은 기사끼리 죽이는 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 결국 당시 시대적 측면을 보았을 때

중세인들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컸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입니다.

 

2) 또한 영주와 기사들이 엄청난 채무에 시달렸습니다.

성지 탈환지는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원정을 통해 원죄 사함(미래의 죄까지)

과 더불어 채무 면제의 기회까지

노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오해

 

1) 종교 전쟁설은 현대와 와서 더 커진 개념

 

17.18세기 이전까지는 침략전쟁으로 해석되었지

종교전쟁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군(Crucesignati)이라는 용어는

현대에 들어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2) 문명의 충돌

 

이 십자군전쟁 말고도

중동과의 전쟁은 전 세계 전쟁에서도 절반이상

을 차지하는 만큼 빈번한 충돌이었습니다.

 

이렇게 중동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후 현대에 와서

더욱 십자군전쟁에 대한 더욱 반감을 갖게된 것입니다.

 

3)무자비한 침략 전쟁

 

무조건 이슬람을 짐승처럼 보고 전쟁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돈만을 보고 간 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자비로 출정한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서막 '민중 십자군'

 

출정 당시 교황과 군주와의 권력 다툼 중이어서

원정을 위해서는 막대한 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열광적으로 모여든 자원병 때문에 제대로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은자 피에르는

'하나님의 편지'로 선동해서 민중 십자군을 만들다 보니

원정 중 약탈이 극심하게 자행된 것입니다.

 

 

이렇게 약탈을 일삼았던 민중 심자군 일부가 몰살됩니다.

 

알렉시우스 1세가 이 민중 십자군을 소아시아로 보내버리는데

여기에서도 약탈을 일삼았고

그 뒤 셀주크 튀르크 군대에게 몰살됩니다.

 

 

십자군 전쟁 전개

 

주요 4개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해서

1차 십자군전쟁이 시작됩니다.

 

 

민중 십자군은 하나의 헤프닝에 불과했지만

의외로 튀르크에게는 전술적 미끼로 사용된 결과가

됩니다.

 

1차 십자군 원정에 의기양양한

셀주크 튀르크군은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형제간의 권력 투쟁에 힘쓰게 됩니다.

 

당시 셀주크 왕은

'킬리지 아르슬란'으로 나이가 17세의 어린 나이였고

 

여기에 도망간 은자 피에르가 1차 십자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에 더욱 십자군을

우습게 봅니다.

 

1차 십자군이 니케아를 점령하자

당황한 아르슬란이 하지말아야 할 전면전을 벌여

패배합니다.

 

 

이 때 셀주크는 비잔티움과 협상해

학살을 안 하는조건으로 항복하고 비잔티움이

이들의 성을 정복합니다.

 

이렇게 해서 비잔티움과 동맹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양진영의 무기

 

롱 소드(long sword)<십자군>

날의 길이 80cm이상, 매우 두꺼움

강도가 약해지는 문제 발생

 

 

샴쉬르<이슬람>

길이는 롱 소드보다 짧았지만

'다마스커스 강'으로 제작되어 우수한 강도 자랑

향후 유럽에 영향을 주어 기병검(사브르)가 나오게 됨

 

 

타격무기<십자군>

주력무기는 렌스(긴창)였지만

철퇴, 도끼, 워 해머, 플레일 등 다양한 무기 사용

 

 

사슬갑옷

십자군, 이슬람 모두 기본 갑옷

호버크(십자군)은 보온기능이 있어

사막환경에 최적이었습니다.

이슬람군은 토르소를 입었습니다.

 

투구

 

 

 

 

 

 

십자군의 독자노선

 

니케아 공방전 이후 비잔티움은

모든 지원을 끊어버립니다.

 

전투에 패한 아르슬란은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십자군 선두에 섰더 보에몽의 군대는

습격을 당하게 되는데

아르슬란은  '족공술'을 활용해 원거리에서 공격합니다.

 

 

전멸 직전 십자군의 본대가 도착하자

아르슬란은 신속히 철수하는 판단을 합니다.

 

이후 험난한 여정 끝에 안티오크에 도착한 십자군은

정말 헐벗은 거지 수준이었고 가는 도중 에데사 등

기독교 도시도 약탈했습니다.

 

따라서 성지 탈환이라는 전쟁의 명분은 사라진지

오래되어 버린 것이죠.

 

'안티오크' 성곽은 12km 정도의 거대 도시여서 쉽게

함락이 어려웠고,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린 십자군이 거의

아사 직전 내통자와 합작하여 안티오크를 점령합니다.

 

안티오크를 점령하며 십자군은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신의 기적으로 이룬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롱기누스의 창

 

안티오크를 돕기 위한 모술 군대가 함락 후

하루 뒤에 도착합니다.

 

십자군 역시 지칠대로 지친 상황에서

한 사제가 "하나님의 계시를 봤다"

라고 외칩니다.

 

어디가서 땅을 파라고 하고 그래도 했고

발견된 것이 '롱기누스 창'입니다.

 

 

사실 사기 진작을 위해 신앙심을 이용한 사기였지요

당시 성창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습니다.

 

결국 상승한 사기와 신앙심으로 십자군(200명)은

튀르크군(1만)을 향해 돌진하고 승리합니다.

 

이 전쟁을 돕기 위해 비잔티움이 오다가

안티오크 전투는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갑니다.

 

안티오크 점령 이후

 

이로 인해 비잔티움은 십자군과 계약파기가 되고

십자군은 이후 승전하는 곳은 모두 이들의

차지가 되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무역의 중심지이기도한 안티오크를 차지한 보에몽은

에루살렘이 가지 않고 눌러앉습니다.

 

하지만 기적같은 전투 승리로 십자군은 용기백배가 되고

예루살렘으로 출정합니다.

 

 

1099년 6월 예루살렘 공방전 시작

 

보에몽의 주력이 빠진 부용의 기사단이

함락을 위해 출발합니다.

 

당시 십자군 병력은 약 1만 3천여명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도착한 후 십자군은 이교도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것에

 광분하게 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실제 지배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이 오기 1년 전에 파티마(시아파) 왕조가 재정복을

한 것입니다.

 

파티마은 십자군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공성탑 제작

방지를 위해 주변의 나무를 다 베어립니다.

 

그런데 주변 땅속에서 손질된 나무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공성 탑으로 만들어 성곽을 공격해

결국 에루살렘을 함락합니다.

 

십자군 2편으로 이어집니다.

아래를 눌러주세뇨~

 

www.notsunmoon.tistory.com/208

 

위의 내용을 아래 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https://youtu.be/WxwyKk3xL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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