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장자철학> 17-5강, 특정 관점에 갇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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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장자철학> 17-5강, 특정 관점에 갇힌 사람

notsun 2021. 4. 7. 00:30

 

" 한번 정해진 관점.

특별한 형태가 있는 관점 "

 

특별한 형태가 있는 것들 중에

현대사회에서는

'주의(主義)'라는 것이 있다.

 

보수.진보.사회.국가.전체....  주의를 가지고 있다.

 

'주의'라는 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현상을

설명해 놓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 '주의'에 한번

갇히게 되면 세상 끝날 때까지

이 주의만 가지고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한 번 이 관점에 갇히면

주의 사람들과 서로 다투는 것이

극에 이른다.

 

 

 

 

 

"수고 해도 얻는 것이 없다."

 

이는 얼마나 슬픈일인가?

이렇게 되면 애써 수고해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모든 주의는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변화하는 모든 것들의 것이다.

따라서 한 순간의 한 현상을 특정한

'주의'가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주의에 갇힌 사람은

지성이 작동하지 않고

자기 지력. 지성을 감추고

'주의'만 작동시키기 때문에

주의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는 지치고 낧아가는 것을 모른다.

 

 

 

 

 

"생각이 살아있는 사람"

 

생각이 살아있다면

'주의'를 사용하지 않는다.

 

현상을 놓고 그 현상 자체를 논하지,

그 주의를 가지고 이 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낧은 행위이다.

 

"이는 폭력이요 고갈을 자처하는 행위이다."

 

정해진 틀을 자기의 스승으로 삼고

그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고갈되기 쉽다.

 

이렇게 특정 관점에 갇힌 것을

장자는

성심(成心)이나 성견(成見)으로 표현했다.

 

우리사회의 부정적 흐름은

자본주의를 나쁘게 말하면

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이 짧으면 이런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어떤 주의를 가지고 덤비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구체적인 현상 하나 하나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생각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어떤 주의를 가져버리면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활동을

의도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진다.

 

생각을 하지 않고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생각이 살아있는 사람은

구체적인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

 

우리 의식의 높이는

가만히 생각히 생각해 볼 줄 아는 것이

높은 의식이다.

 

 

"관 찰"

 

지구는 감각과 본능으로 보면

평평하고

지적으로 보면

둥글다.

 

감각과 본능을 생각의 수고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지적으로 보는 것은

수고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수고를 한다는 것은

세계를 독립된 시선으로

자세히 보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을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관찰하면 생각하는 수고를 하면

과학적 삶을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감각적이고 본능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고갈되고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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