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탄생 배경
한양도 아닌 수원 화성에
이런 최첨단의 기술을 활용한
성곽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조는 재임기간 중 무려 13회나
화성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정조는 자신의 왕권이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한양에서 화성까지 행차과정을 모두 그림에 담았으며
이중에는 군사훈련 시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서장대를 중심으로 낮과 밤 동안 군사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서장대에 정조가 앉아있고
서장대 주면 2,700여명의 친위대가 배치되고
성벽 주위에 1,000명의 군사가 추가 배치되었고
화성 주택가에서도 횃불을 밝혀
행사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임금 행차에 군사훈련은 매우 이례적인 행사라고 합니다.
경비 영역
표지석을 중심으로 경비의 영역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총 5개의 영역으로 나뉘는데
장락전위, 장락후위, 장락우위, 장락좌위, 장락중위로
구분됩니다.
또한 수원 인근
(안산, 시흥, 과천, 용인, 진위)
에서 약 만여명의 군사가
지원하는 체계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왜 정조는 수원을 군사력을 집중했을까?
군사 거점인 강화, 송도, 한양, 남한산성, 수원 중
수원은 한양과 충청. 전라를 잇는 연결망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조는 화성 행차 때 항상 군복을 입었다고 하며
이는 이곳의 군사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군사력 과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신도시를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 화성은 정조의 정치력, 군사력
핵심이 되는 거점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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